기사최종편집일 2024-05-21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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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시네리뷰'] '위아영', 이런 게 과연 젊음일까

기사입력 2015.06.04 02:15 / 기사수정 2015.06.27 01:12

이영기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조쉬(벤 스틸러)와 코넬리아(나오미 왓츠)는 40대 중반의 부부다. 이 둘은 직간접적인 불임의 상태에 놓여 있다.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고, 다큐감독인 조쉬는 8년째 후속작이 없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아이를 낳은 친구 부부는 조쉬부부에게 아이를 빨리 낳으라며 다그친다. 마치 아이를 낳아야만 진짜 어른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투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유산을 경험한 코넬리아는 더 이상 애를 낳는 일에 얽매이고 싶지가 않다.

아이 문제로 또래의 친구들과 거리감을 느끼는 조쉬부부 앞에 자유로운 영혼의 20대 커플 제이미(아담 드라이버)와 다비(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등장한다. 조쉬부부는 또래의 늙다리 세계보다 이 젊고 창의적인 세계에 훨씬 끌린다.

제이미와 다비는 조쉬부부의 불임상태와 정반대되는 세계를 살고 있다. 필요한 가구를 직접 만들고, 황혼 무렵의 터널을 걸으면서 여행 기분을 낸다. 뭔가를 만들어내고 실행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영화 ‘위아영’은 ‘젊음’을 내용전개를 위한 일종의 묘약이나 초능력처럼 사용한다. ‘왓 위민 원트’에서 멜 깁슨이 여자들의 속마음을 듣는 능력을 갖는 것이나, ‘클릭’의 아담 샌들러가 만능리모컨으로 시간을 마음대로 휘젓는 것처럼. 이 초능력에는 언제나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서사의 초반부에는 초능력에 취한 주인공이 전심전력으로 쾌락에 빠져든다.

그러다 초능력이 열어놓은 천국의 문은 슬슬 닫히기 시작하고, 곧장 지옥행이 이어진다. 거의 관습적인 이런 전개는 초능력의 무용함을 통과해서 현실의 귀중함을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 이 허망한 귀결을 위해 초능력의 ‘효능과 부작용’은 딱 떨어지게 동등한 값을 갖도록 디자인된다.

 

과정인가, 결과인가

조쉬는 다큐계의 거장인 장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선지 다큐의 주제는 너무 거창하고 작업의 끝은 보이질 않는다. 장인만큼 성공하겠다는 ‘결과’에 꽁꽁 묶여 있다. 반면 조쉬가 보기에 제이미는 다르다. 다큐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거워한다. 거기다 일상과 예술이 섞여들고, 과정과 결과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제이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젊음의 경구를 인격화한 인물이다. 하지만 제이미의 일상예술화전략은 너무 지나치다. 제이미는 자신의 다큐를 만들기 위해, 다큐거장의 사위인 조쉬에게 일부러 접근하고 거의 몰래카메라처럼 조쉬를 속여 낸다. 그럼에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제이미에게 조쉬는 자신이 완성한 작품의 한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현실의 삶과 인물’은 모두 편집 가능한 소스일 뿐이다. 과정은 바로 결과가 되고, 현실은 바로 영화가 된다.

희생 될 수 없는 것의 희생

조쉬와 제이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다큐는 극영화보다 진실성이 요구된다. 관객인 우리는 그런 믿음을 기초로 다큐를 본다. 하지만 제이미가 다큐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그것을 다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코넬리아와 그의 (다큐 거장이라는)아빠는 이런 윤리적 일탈에 별 관심이 없다. 왜냐면 결과물로서 제이미의 작품이 ‘좋기’ 때문이란다. 허탈하지만 이런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특히 예술가들의 세계에선 이런 ‘이기적인 예술적 야심이야말로 걸작의 근거가 된다’는 헛소문이 떠돈다. 심지어 자신의 실패를 ‘저 정도로 악독하지 못해서’라고 말하는 경우들도 있는데, 대체로 그런 말을 주워섬기는 분들은 충분히 탁하다.

이 모든 사기극의 끝에서 조쉬는 코넬리아에게 ‘그래도 제이미가 악마는 아니’라고 뭔가 깨달은 듯이 내뱉는다. 이런! 제이미는 당연히 악마가 아니다. 악마는 얼마나 거창한 이름인가. 제이미는 그냥 사기꾼이다. 장래에 어떤 다큐를 만들지 모르지만, 그의 사기꾼적 방법론이 바뀌리라고 기대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래서 ‘위아영’이라는 제목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제목이란 그 기둥주위를 배회하면서 영화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도록 돕는 기준점이다. 감독은 ‘젊음’이라는 단어로 ‘영화 속의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모여들도록 설정해 놨다. 그런데 과연 제이미의 행위들이 젊음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게 젊음이라고?

‘위아영’은 40대가 바라보는 20대의 젊음이다. 여기에는 회고적 감성과 그에 따른 간극이 존재한다. 이 격차 속에서 40대가 잃어버린 젊음의 내용들이 나열식으로 등장한다. 엘피판과 자전거, 마약과 파티, 이어지는 고백의 밤. 영화에서는 히피의 도시적 후손인 힙스터들의 세계가 젊음의 상징처럼 그려진다. 힙스터?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는 한 줌의 예술가들, 대중적 유행을 벗어나 아날로그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

이들은 청춘의 반문화적 감성을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감독이 힙스터인 제이미를 ‘오늘의 젊음’으로 선택한 것은 납득할 만하다. 그런데 그렇게 기껏 골라놓은 제이미로 하여금, 다큐 작업자로서의 윤리와 힙스터로서의 생활철학을 동시에 쓰레기통에 처넣게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세상에는 물론 제이미같은 거짓말쟁이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의 제이미는 그냥 제이미여야 한다. 젊음의 대표주자로 소환되어 이 거짓말의 함량이 원래 청춘의 상수인 것처럼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특정 연령이 거짓말에 더 능통하다는 조사를 본 적이 있는가?

감독의 의도가 어떻든 ‘위아영’이라는 제목은 이런 일반화를 시도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과는 찜찜하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젊음이 있지만, 이것은 우리를 위한 젊음은 아니다. ‘위아영’은 재치 있는 영화지만, 제목과 달리 젊음에 대해서보다는 나이듦에 대해서만 뭔가를 들려준다. 자신이 젊음을 포용하고 있다는 나이듦의 착각에 대해서 말이다.

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nivriti@naver.com 

[사진=위아영ⓒ브리즈픽처스]



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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