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5-27 07:55
스포츠

[신명철의 캐치 콜]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

기사입력 2013.05.24 13:24 / 기사수정 2013.05.24 22:35

김덕중 기자


[엑스포츠뉴스=신명철 칼럼니스트] 30년 넘게 스포츠 관련 일을 하고 있는 글쓴이가 최근 얼굴이 화끈할 정도로 창피한 일이 있었다. 어느 체육 단체 모임에 갔다가 전국체육고등학교체육대회 관련 자료를 받고서였다. 무엇보다 놀란 건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강원체고 주관으로 춘천시 일원에서 열린 이번 대회가 27번째였다는 사실이었다. 이 기간은 글쓴이가 스포츠 기자 활동을 하던 때와 거의 겹친다. 그런데 글쓴이는 이런 대회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창피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뒤늦게나마 몇 가지 정보를 그러모았다. 이 정보가 스포츠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대회에는 기초 종목인 육상과 수영을 비롯해 체조, 유도, 양궁, 사격, 태권도, 역도, 레슬링 등 주요 국제종합경기대회에서 효자 종목으로 제 몫을 다하는 종목이 남녀부에 걸쳐 진행됐다. 복싱과 펜싱, 근대5종은 남자부만 열렸다.

이 대회 개막식에는 박종길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참석했다. 대회 창설 이후 체육 관련 정부 부처에서 차관급 고위 공무원이 참석한 게 이번이 두 번째라는 사실을 대회 역사를 잘 아는 관계자 몇 분이 겨우 기억해 냈다고 한다. 대회 초창기인 1980년대 후반 누군가 고위직 인사가 참석했는데 끝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하니 박 차관의 개회식 참석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여기서 잠깐 박 차관의 이력을 소개한다. 박 차관은 지난 3월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으로 보임되기 전까지 태릉선수촌장을 지냈다. 초창기인 1960~70년대를 빼고 제9대 김성집 선생(1948년 런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역도 동메달리스트)을 비롯해 대부분의 태릉선수촌장은 경기인 출신이다. 박 차관도 경기인 출신이다. 그런데 그냥 경기인이 아니다.

박 차관은 1970~80년대 한국 사격의 간판 스타였다. 해병대 장교 시절 사격에 입문했으며 1973년 대위로 예편한 뒤 더욱 사격에 전념해 1978년 제8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속사권총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 대회에서 박종길의 금메달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대회신기록(593점)인데다 한국 선수단이 기록한 사격 종목의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북한은 이 대회 사격 종목에서 금메달 6개를 획득했다. 당시 사격 선수단의 분위기가 어땠을 것이란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터이다.

사격 종목 닷새째까지 금메달이 나오지 않아 노심초사하던 사격 대표팀은 박종길의 금메달로 큰 짐을 덜 수 있었다. 시상대에 선 박종길이 은메달리스트인 북한의 서길산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서길산이 이를 거절한 일화는 당시 남북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 시절 박종길의 금메달은 의미가 각별했다.

박종길은 1982년 뉴델리 대회에서는 스탠다드 권총에서, 1986년 서울 대회에서는 속사권총 단체전에서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어 아시아경기대회 3연속 금메달이라는 흔치 않은 기록을 세웠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개인전 2연속 금메달은 당시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70년 제6회 방콕 대회와 1974년 제7회 테헤란 대회에서 2연속 2관왕에 오른 수영의 조오련, 1966년 제5회 방콕 대회와 1970년 제6회 방콕 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복싱의 김성은 그리고 1970년 대회와 1974년 대회 여자 포환던지기에서 연속해 정상에 오른 백옥자 등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박종길이 마지막으로 금메달을 딴 1986년 대회 때 그의 나이 40살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박종길은 악명 높은 불암산 크로스컨트리에서 후배들을 따돌리고 1위로 정상에 오를 정도로 강한 체력을 자랑했다. 박종길의 사격 인생에서 빛나는 또 하나의 훈장은 1978년 태릉에서 열린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센터파이어 권총에서 주최국의 체면을 살리는 은메달을 명중한 것이다. 한국은 71개국 1천5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1988년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국가 대표 사격 선수 박종길은 우리나라 체육 행정을 총괄하는 차관이 됐다.

이 뿐이 아니다. 최근 체육인들의 움직임은 눈을 크게 뜨고 볼 만하다. 지난 2월 제38대 대한체육회 수장으로 뽑힌 김정행 회장은 1967년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유도 은메달리스트인 경기인 출신이다. 대한체육회라고 하니까 경기인 출신이 회장이 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물을 이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1920년 7월 출범한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 전신) 제1대 회장은 장두현 선생이다. 장 회장은 민족정신이 매우 강한 종로의 대실업가로 독립운동가인 서울YMCA의 이상재 선생 등과 친분이 두터워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서울 종로의 대실업가니까 요즘으로 치면 재벌 총수쯤 된다. 제27대 회장(1982년 7월~1984년 10월)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대선배인 셈이다.

두 회장 같은 재계 인사와 독립지사, 정치인, 교육자 등이 조선체육회와 대한체육회를 이끌었고 경기인 출신(럭비풋볼)으로 대한체육회장이 된 이는 김종렬 제30대 회장(1989년 2월~1993년 2월)이 처음이다. 이후 경기인 출신 회장의 맥이 끊겼다가 김정행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박 차관과 김 회장의 뒤에는 국회에서 활발한 의정 활동을 하고 있는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의 주역 이에리사 의원이 있다. 바야흐로 체육인 전성 시대다.

체육인들이 더욱 분발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고 전국에 있는 17개 체육대학과 23개 체육중·고등학교 그리고 국립 한국체육대학에 다니고 있는 스포츠 전공 학생들에게 최고의 본보이기도 하다.

스포츠 팬들에게 가장 익숙한 서울체고 관련 이야기를 보탠다. MBC와 SBS에서 오랜 기간 해설을 한 신문선 명지대 교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과 호흡을 맞춰 한국의 4강을 이끈 이용수 세종대 교수, 강신우 전 대한축구협회 기술국장, 황보관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김종환 중앙대 교수 등은 축구 팬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 봤을 법한 축구인들이다. 이들은 서울체고 동문이다.

서울체고 축구부 1기인 신문선과 이용수는 3학년 때인 1976년 후배들을 이끌고 전국고교선수권대회와 추계연맹전 그리고 부산MBC대회 등 전국 규모 대회 3관왕에 올랐다. 동일계 진학 혜택이 있기는 했지만 서울체고 축구부 선수 가운데 일부는 서울대와 연세대에 진학하는 등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 스포츠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학생’은 구호로 이뤄질 일이 아니다. 실천해야 할 과제라는 사실을 앞에 나온 체육인들이 증명하고 있다.



신명철 칼럼니스트 sports@xportsnews.com

[사진=박종길 문광부 차관(가운데) ⓒ 생명나눔 제공]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

ⓒ 엑스포츠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주요 뉴스

실시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

주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