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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더 백구대제전] 김상우 위원 "한일전은 배구 인기의 중심"

기사입력 2012.12.31 09:40

조영준 기자


[엑스포츠뉴스=조영준 기자] "1995년 월드리그 한일전 때 우리들을 응원하는 관중들의 응원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축구와 야구가 그렇듯 배구의 '한일전'도 숱한 명승부를 펼쳐왔다. 90년대 한국과 일본의 치열한 승부는 배구 인기의 '핵심'이 됐다. 하종화(현대캐피탈 감독) 마낙길(전 현대캐피탈) 임도헌(삼성화재 코치) 박희상(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김세진(KBSN 해설위원) 그리고 신진식(홍익대 감독) 등 기라성 같은 스타플레이어는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를 호령했다.

특히 '숙적' 일본과 경기를 펼칠 때 이들의 마음가짐은 확실히 달랐다. 하종화 감독은 "그 때 일본과 경기를 하고 패하면 공항에 들어오기 힘들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위에서 열거한 한국 남자배구의 '거포'들은 모두 나카가이치 유이치(일본, 전 신일본제철 감독)를 잊지 못한다. 90년대 한국배구의 전성기를 체험했던 김상우(39,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위원은 "나카가이치는 점프력이 대단한 선수였다. 높은 점프력에 파워도 겸비했고 볼을 때리는 각도도 좋았다. 여기에 승부근성도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일본 남자배구대표팀의 경기력은 주공격수인 나카가이치의 컨디션 여부에 달렸다. 몸 상태가 절정에 오른 나카가이치는 좀처럼 막기 힘들었다. 중요한 고비처에서 나카가이치에 볼을 올라가는 것은 모두 알았지만 블로킹 위나 사이로 때리는 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90년대 남자배구 한일전은 매우 뜨거웠고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특히 '배구사랑'으로 유명한 일본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은 인상적이었다.

김상우 위원은 "90년대 초반 처음으로 일본 원정경기를 갔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배구 열기에 놀랐는데 일본 선수들이 서브를 넣을 때 체육관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또한 선수들이 서브를 넣거나 공격을 할 때 관중들이 기합을 넣어서 응원했고 관중석은 늘 빈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진 = 일본남자배구대표팀, 뒷줄 가운데가 나카가이치 유이치 대표팀 코치다. 국제배구연맹(FIVB 제공)]

또 김 위원은 "호텔 앞에서도 일본대표팀을 보기위해 몰려드는 팬들로 장사진을 쳤다. 다른 국적의 선수들도 좋아하는 일본 팬들도 많았다. 예전에는 최천식 선배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당시 한국국가대표 선수들도 일본 팬들이 있었다"고 덧붙었다.

일본의 배구 사랑은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일본여자배구대표팀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세계를 제패한 일본은 배구를 주력 종목으로 삼아 장기적인 투자에 들어갔고 현재는 굵직한 국제대회를 모두 자국에서 개최하고 있다.

일본은 배구 전문지가 존재할 만큼 두터운 선수층이 존재한다. 김 위원은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일본의 배구전문잡지를 구독했다. 선수들을 포장하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배구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지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도 배구 인기가 높았지만 일본의 인기는 부러울 정도였다"고 밝혔다.

잊을 수 없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예선전과 1995년 월드리그

지금까지 배구 올드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한일전 명승부가 있다. 바로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출전권을 놓고 펼친 한일전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지역예선전은 한국에서 1차 리그가 열렸고 2차 리그는 일본에서 개최됐다.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1차 리그 한일전에서 한국은 0-3으로 완패했다. 배수의 진을 치고 일본으로 건너간 대표팀은 중국에 2연승을 거두면서 기사회생했다. 남은 것은 홈팀 일본과의 최종전이었다. 만약 일본이 2차 리그에서 중국을 잡았다면 한일전과 관계없이 애틀랜타 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 덜미가 잡혔고 최종전인 한일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하는 상황에 몰렸다.

당시 한일전은 애틀랜타 올림픽으로 가기위한 '단두대 매치'였다. 이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투입됐던 김 위원은 "신진식 감독이 생애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신 감독은 나카가이치와의 승부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또한 신영철 감독의 토스도 워낙 좋고 빨랐다"고 회상했다.

1차 리그에서 김상우 위원은 주전 센터로 나섰다. 그러나 실명할 정도의 눈 부상을 안고 있었다. 결국 일본에서 열린 2차 리그에서는 경기대 선수였던 박선출이 주전 센터로 투입됐다.



신진식의 무서운 기세로 1,2세트를 따낸 한국은 승기를 잡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백전노장'이 된 나카가이치의 위력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3세트를 만회한 일본은 4세트에서 무섭게 한국을 추격했다.

김 위원은 "한국과 일본의 수비력은 비슷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빠른 플레이를 구사했고 이 점이 승부에 영향을 미쳤다. 신영철 감독의 빠른 토스를 신진식 감독과 박희상 위원이 전광석화처럼 받아쳤고 블로킹의 높이도 높였다. 또한 행운도 따랐다"고 말했다.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포인트는 김세진의 블로킹 득점이었다. 아직도 그 때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밝힌 김 위원은 "김세진 위원의 블로킹 득점으로 경기가 끝난 뒤 그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한일전은 95년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월드리그였는데 우리가 2연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관중들의 응원은 너무나 뜨거웠다"고 밝혔다.

90년대 한국남자배구는 일본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지만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한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예선전에서 일본에 패했고 2012년 런던올림픽 예선전에서도 일본에 발목이 잡혔다.

"일본배구와 한국배구는 어린 선수들의 저변 문화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요. 특히 일본의 스태프는 부러울 정도죠. 일본은 선수들을 뒷받침해주는 스태프의 수가 많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몸 관리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아픈 상태에서 2~3주 동안 손발을 맞추고 대회에 임하니 큰 차이가 납니다. 어린 선수들의 기본기가 하루 속히 발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 맞는 스피드 배구를 시도하는 것도 해볼만하다고 생각해요."

[사진 = 김상우, 한국남자배구대표팀 (C) 엑스포츠뉴스DB, 나카가이치 유이치 (C) FIVB 제공]

조영준 기자 spacewalker@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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