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5-19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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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유야담의 무인들 '신말주와 신응담'

기사입력 2011.01.27 15:24 / 기사수정 2011.01.27 15:25

무카스 기자

[엑스포츠뉴스/무카스=허인욱 객원 칼럼리스트/무술전문위원]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유몽인이 살았던 당시 용맹이 있는 인물로 '신말주(申末舟, 1429~1503)'와 그의 현손 '신응담(申應澹)'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신말주는 공조참판으로 죽은 신장(申檣, 1382~1433)의 아들로 신맹주(申孟舟)·신중주(申仲舟)·신숙주(申叔舟)·신송주(申松舟)의 형제 중 막내였다.
 
그가 단종 2년(1454)년에 과거에 합격하자 형 신숙주가 축하연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맑은 직이라고 칭하는 청직(淸職)을 두로 지냈는데, 형 신숙주가 세조를 도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데 첫 번째 가는 큰 공을 세우자 신말주는 병을 핑계대고 순창으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명칭을 귀래(歸來)라 하고 노년을 보냈다.
 
신말주는 젊은 시절 날래고 용맹이 빼어났다. 하루는 길이가 아홉 자(1자를 20cm 정도로 잡으면 1m 80cm이다)가 되는 병풍으로 몸을 둘러싸 팔다리와 몸만 간신히 들어가게 한 다음, 단번에 몸을 날려 그 병풍을 뛰어넘었다. 그에게 사작(乍作)이라는 노비가 있었는데, 그 또한 병풍 밖에서 병풍 안으로 뛰어 들어오니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에 용맹으로 이름난 사람들 가운데 그 같이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성종실록'에는 신말주가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임명되었을 때, 창원은 바닷가여서 무신만 보내는 곳이니 그가 그의 직을 바꿔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성종은 신말주가 활쏘기를 잘하기 때문에 창원부사에 임명했다고 하며, 사양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문신임에도 활쏘기에 능하다는 점과 무신 직에 임명했다는 점에서 그이 무예 솜씨가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신말주의 현손 신응담의 용맹 또한 짝할 이가 드물었다. 그는 어느 날 신장이 8자인 사람의 정수리에 1자 남짓한 높은 관을 씌우고 그 관 위에 또한 1자쯤 되는 나무를 옆으로 누여 올려놓았다. 10자 정도 되니, 2m의 높이 앞에 선 신응담이 움직이지 않다가 단번에 몸을 솟구쳐 그 나무를 뛰어넘었다. 세상에서 용맹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에 미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젊은 시절 서대문 밖의 모화관(慕華館)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어느 날 일이다. 장안의 무녀들 중 나이 어린이들을 뽑아 화려하게 단장시키고, 높다란 누각에 색실이나 색 헝겊 도는 색종이 등을 지붕이나 문 위에 내걸어 아름답게 꾸미는 결채(結綵)를 하고 대열을 나누어 제사를 지내려 했다. 그 때 많은 도성 사람들이 가서 구경을 했다. 날렵하고 용맹한 협객 수십 명이 여러 창기들을 모아 놓고 큰 못 갓에서 성대하게 잔치를 열고 있다가 신응담의 용맹이 세상에서 으뜸이라는 말을 듣고 예를 다하여 그를 맞이했다. 신응담이 이르자 높은 소반에 큰 술잔을 올리고 진귀한 음식과 맛좋은 술을 권했다.
 
각각 높이 뛰어오르는 재주를 겨루는데, 어떤 이는 그 간격이 두어 길이 되는 두 섬들이 항아리를 뛰어넘었다. 또, 어떤 이는 세 마리 또는 다섯 마리 소를 훌쩍 뛰어넘었는데, 마치 나는 듯했다. 신응담에게 요청하면서 "당신은 소를 몇 마리쯤 뛰어넘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여덟 마리는 넘을 수 있소"라고 대답했다.
 
여덟 마리의 소를 나란히 세워 놓고 몸을 한 번 솟구쳐 뛰어올랐는데, 일곱 마리 소를 지나고 여덟 번째 소를 차니, 소의 척추가 부러져 쓰러졌다. 여러 협객들이 이를 보고는 눈빛이 동요하더니, 드디어 줄지어 늘어서서 절을 올렸다. 그리고 앉힌 뒤, 용모와 자태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창기 두 명을 지목해 올려 시중들게 하고는 그대로 머물러 유숙하기를 청했다. 장차 밤놀이를 하려고 하자, 신응담이 말했다. "내가 우연히 여기에 온 것은 본디 그대들 때문이 아니오."
 
드디어 크게 취하여 옷깃을 떨치고, 두 명의 창기를 끼고 함께 말을 타고 가 버렸다.
 
이틀 후 승정원에서 처리한 사항을 기록하여, 매일 아침마다 반포하는 관보인 조보(朝報)에, '무뢰배 여러 명이 남의 집 겹 지붕을 넘어 미녀를 훔치다가 대장에게 잡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응담은 연루되지 않았다.
 
신응담은 경학을 공부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외웠으나, 이를 버리고 무업(武業)으로 과거에 급제해 당시 4품 벼슬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을 보면, 선조 28년(1595)에는 선전관(宣傳官), 34년(1601)에는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39년(1606)에는 경상우병영우후(慶尙右兵營虞候)를 역임했음을 알 수 있다.
 
[글] 무카스 제공



무카스 한혜진 기자 haeny@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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