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의 신
[엑스포츠뉴스=김승현 기자] '직장의 신'은 세태를 꼬집는 동시에 웃음도 놓치지 않는 드라마다. 하지만 그 웃음은 통쾌하면서도 씁쓸하다. 미스 김(김혜수 역)이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시청자에게 대리 만족을 통한 쾌감을 선사한다면, 정주리(정유미 역)는 현실적인 인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KBS 월화드라마 '직장의 신'이 전작 '광고천재 이태백'의 부진을 씻어내고 있다. '광고천재 이태백'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광고인들의 세계를 다루면서 의욕적으로 출발했지만 광고계의 현실보다 사랑이야기에 치중하면서 시청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직장의 신'은 비정규직과 계약직이 넘쳐나는 현실을 반영하면서 보는 이들의 뜨거운 공감을 얻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 공감의 초점은 농익은 미스 김이 아닌 덜 익은 정주리에 맞춰져 있다. 정주리는 심각한 취업난을 대변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정주리는 1700만 원의 학자금 대출금까지 떠안고 살아가는 취업준비생이다. 하지만 연이어 취업에 실패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스펙을 지녔는지를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풀이 죽어 있던 그녀에게 'Y장'이라는 회사의 면접 기회가 주어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반드시 입사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면접장에 들어선 그녀는 면접관인 장규직(오지호)과 무정한(이희준)에게 "똥인지 된장인지는 가려봐야 한다"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스펙을 '오기'로써 이겨내려고 한다. 그녀의 오기가 '패기'로 받아들여서인지 가까스로 합격의 영광을 누린다. 하지만 사실 장규직은 정주리의 외모에 반해 합격자 명단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이는 외모도 하나의 스펙, 아니 매우 훌륭한 스펙이라는 우리의 잘못된 세태을 반영한다.
정주리는 햇병아리 신입 계약직답게 의욕은 넘치지만 실수를 연발하면서 'Y장'의 사고뭉치로 떠오른다. 중요한 회의 자료가 들어있는 USB를 택시에 놓고 내리고, 정사원인 금빛나(전혜빈)의 일을 도우려다 오히려 대량 리콜 사태를 일으킨다. 평소 계약직 사원을 무시하던 장규직에게 정주리는 앙숙인 미스 김만큼이나 눈엣가시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정주리에게 정규직 사원 장규직은 동경의 대상이다.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과 월등한 스펙으로 무장한 그의 모든 것이 화려해 보인다.
그러나 동경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장규직은 실수를 연발하는 정주리에 "내가 왜 계약직 사원을 언니라고 부르는지 알아? 허드렛일하는 뜨내기들에게는 이름 부르는 것도 아깝기 때문이야. 출입증과 사원증이 비슷하게 생겼다고 구분을 못하는데 언니는 곧 잘릴 거야"라며 비수를 꽂는다.
9일 방송된 '직장의 신' 4회에서도 정주리를 둘러싼 사회적 통념이 등장한다. 바로 파견회사 매니저가 정주리에게 회식 자리에서 끝까지 남아있을 것을 종용한 것이다.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갈구하는 정주리는 밤을 새우며 기획안을 작성해 장라인의 정규직 사원에게 건네지만 전날 과음을 한데다 밤샘을 한 피로감이 겹쳐 설문 조사지를 배포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결국 장규직은 정주리를 질타했고, 힘들여 만든 번뜩이는 기획안은 도리어 남의 공이 돼 버린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 꼴이라고나 할까. 정주리는 그동안 자신이 외쳐왔던 '꿈이 스펙을 이긴다'는 문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뼛속 깊이 절감하게 된다.
'직장의 신' 매회 극 후반에는 정주리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누구나 한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 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은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이 내레이션은 김기림 시인의 '바다와 나비'를 연상시킨다. 이 시에서 바다는 근대 문명을 의미하고, 나비는 무기력한 시적 화자를 나타낸다. 나비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지만 곧 좌절하고 만다. 지금까지의 정주리를 보면 단연 수긍이 간다. 이 드라마에서처럼 사회 초년생들에게 현실의 벽은 우러러볼수록 높아만지고, 반대로 좌절감은 점점 더 깊어만진다. 그토록 동경했던 세계는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미스 김은 의기소침해 있는 정주리에게 "회식, 연줄. 이런 것은 너를 지켜줄 수 없다. 우리는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계약직이기에 몸뚱아리가 재산이다. 몸뚱아리와 자격증이 있으면 다른 회사로 재입사할 수 있다"며 얼음장과도 같은 서늘한 직언을 날린다. 이에 반해 무정한은 "제가 연줄도 없고 힘도 돼주지 못하지만, 대신 발밑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 돼 줄 수 있다. 조금 늦더라도 같이 올라가 보자"며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했다.
냉철한 미스 김과 따뜻한 무정한이 건네는, 온도가 다른 조언은 앞으로 정주리가 직면할 상황을 암시하는 듯하다. 과연 정주리는 어떤 인물로 변화해 나갈까. 이름처럼 '정만 주다가' 손해만 보게 될까? 아니면 미스 김의 조언대로 '무정'하지만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인물이 될까. 혹은 다정하면서도 영리하게 장벽을 헤쳐나가게 될까. 분명한 것은 극 초반에 미스김의 활약이 통쾌함을 주었다면 이제는 현실의 복합적인 요소를 대변하는 정주리가 멋지게 난관을 극복해 가는 장면에 시청자들이 더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김승현 기자 drogba@xportsnews.com
[사진 = 직장의 신 ⓒ KBS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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