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5-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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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야 놀자] (5) 메이저리그 이모저모(타자편)

기사입력 2008.12.23 10:09 / 기사수정 2008.12.23 10:09

유진 기자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MLB야 놀자’는 메이저리그를 '타킷 유저(target user)'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끔 하자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메이저리그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친근하게 미 프로야구를 접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역사’라는 측면에 고개를 돌려보았습니다.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 역사를 살펴보면서 야구의 탄생과 메이저리그의 탄생을 먼저 언급하고, 그 사이에 등장했던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통하여 메이저리그를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의 깊은 역사에 스며든 이야기를 몇몇 선수들의 소개에 의지해야 된다는 점은 아쉬운 점으로 많이 남았습니다. 사이 영, 월터 존슨 등을 제외하더라도 그렉 매덕스, 샌디 쿠팩스, 돈 드라이스데일 등 메이저리그를 이야기 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선수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수박 겉 핥기’에 불과하더라도 ‘이러저러한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를 수놓았다’는 사실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부질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섯 번째 시리즈인 ‘메이저리그 이모저모(타자편)’도 전편 ‘투수편’과 비슷한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단순 선수나열에 그쳤던 전편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래프로 각 시대별 주요 선수를 먼저 소개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감으로써 전편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합니다.

1편 '메이저리그의 탄생과 그들만의 프라이드'
2편 '마이너리그의 눈물 젖은 빵'
3편 '박찬호라는 존재의 의미'
4편 '메이저리그 이모저모(투수편)'
5편 '메이저리그 이모저모(타자편)'
6편 '메이저리그의 리그(?)'

따라서 본 주제에 대해서도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메이저리그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나 readers@xportsnews.com으로 편하게 문의를 해주십시오. 성심성의껏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주]

왜 팬들은 ‘투수놀음’인 야구에서 타자들에게 열광하는가?

야구는 타자들에게 매우 불리한 스포츠다. 일례로 MLB 전체 타율 1위를 차지한 치퍼 존스의 경우 0.364의 고타율을 기록했는데,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가 타석에 나설 경우 안타를 칠 확률이 36.4%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다. 타율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굉장한 것 같으면서도 안타를 칠 수 있는 ‘가능성’으로써의 퍼센테이지를 감안하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는 수치다.

그러나 ‘안타를 만드는 과정’을 이해한다면, 3할 타자를 비롯하여 한 해 100안타 이상 기록하는 타자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운드에서부터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는 정확히 18.44m다. 즉, 투수와 타자는 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수싸움을 펼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투수 구속에 따라 타자가 반응하는 속도는 얼마나 될까? 투수의 구속을 18.44m에 맞춰서 초속을 재측정해 보면 그 답을 쉽게 알 수 있다.


▲ 투수 구속을 18.44m에 맞출 경우 타자가 반응해야 하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위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타자가 제 아무리 느린 변화구에 대처한다 하더라고 최소 0.6초 이내로 스윙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즉, 타격이 이루어 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1초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안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마운드와 타석 사이의 거리, 이에 따른 순간 반응속도의 오차를 줄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타자가 안타 하나를 쳐 내는 과정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으로 연결된다. 단순히 스윙 속도만 놓고 보더라도 타자가 배트를 휘두르는 순간속도에 따라 공을 맞출 수 있느냐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을 맞추는 순간의 스윙 속도가 140km/h이고,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맞추는 그 순간의 궤적(스윙궤적)이 2m일 경우 0.05초라는 수치가 나온다. 즉, 타자가 구종을 판단하는 시간은 110km 체인지업을 기준으로 0.6-0.05=0.55초이며, 140km 속구를 기준으로 0.47-0.05=0.42초인 셈이다.

타자들이 안타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0.5초 내외의 시간에 구종을 판단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힘껏 스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파테이아(정념에서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의미하는 철학용어)’의 상태에 오른 타자들이 타격을 잘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일례로 자신이 부진했던 타격을 쉽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서는 김현수(두산)가 타격왕을 차지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팬들이 타자들에 환호하는 이유도 안타나 홈런을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희소성’에 열광하는 셈이다. 실제로 팬들은 ‘화끈한 투수전’보다는 ‘화끈한 타격전’을 더 즐기는 경향이 있다. 투수전의 양상은 한 팀에서 퍼펙트 게임이나 노히트 노런이 나오지 않는 이상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 시즌, 3할 타자가 MLB 전체에 50명 밖에 나오지 않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한다.

메이저리그 놈!놈!놈!(1) : 호너스 와그너에서부터 루 게릭까지

그래서 전미 프로야구에 위인으로 투수보다는 타자들이 많이 소개되는 것이다. 베이브 루스를 비롯하여 루 게릭 등은 이미 불멸의 선수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또한, 야구가 침체기에 들어갔을 때 야구의 부흥을 이끈 선수들도 ‘홈런타자’들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루스를 포함하여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 대결은 아직까지 많은 화자가 되기도 한다(그러나 두 선수는 약물 의혹으로 다시금 야구계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추후 다시 자세하게 하겠다).

타격으로 불멸의 기록을 쌓은 선수들을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890년대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많은 ‘명예의 전당’ 타자들이 배출되었다.

야구가 순수 투수놀음으로 여겨졌던 1890년대에는 공의 반발력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고, 한 경기에 한 개의 공만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홈런 자체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스몰야구’가 대세를 이루었는데, 호너스 와그너는 그러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들 중 가장 뛰어난 유격수였다. 722 도루를 기록할 만큼 빠른 발을 자랑한 것은 물론, 개인 통산 3,430안타를 기록하여 유격수 중 단연 돋보였다.

와그너 뿐만이 아니라 역대 타격 1위를 차지한 타이 콥 역시 이 무렵에 등장한 교타자였다. 1905년에 데뷔한 콥은선수생활 24년간 통산타율 0.367를 기록하여 역대 1위를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피트 로즈(前 신시네티)가 자신의 기록을 깨기 전까지 최다안타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다(통산 4,191안타). 다혈질인 그는 야구 외적으로도 많은 뉴스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월터 존슨(前 워싱턴 세네터즈. 통산 414승에 빛나는 명예의 전당 투수)과의 맞대결에서 그가 몸쪽 승부를 꺼려하는 것을 알자 홈플레이트에 바싹 붙어 타격을 했으며, 은퇴 경기에서는 상대팀 포수에게 좋은 공을 던져달라고 부탁해 놓고서는 재빨리 번트를 댔던 괴짜였다.

하지만 당시에 홈런 숫자가 드물긴 했어도 홈런이 아예 안 나온 것은 아니었다. ‘홈런 베이커’라 불렸던 프랭크 베이커가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총 4번의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결코 12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반발력 없는 공의 위력이 투수들에게 큰 도움을 줬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시기에 베이브 루스의 등장은 야구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투수로써 데뷔했지만, 당시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기에 선발로 등판하는 날이면 타석에도 들어서야 했다. 하지만 그가 등판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의 홈런도 구경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투수로써 생애 첫 홈런왕을 차지(1918년)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투수로 등판하지 않는 날에는 외야수로 등판하여 역시 홈런왕을 차지(29개)했다.



▲ 베이브 루스의 등장은 전미 대륙에 야구열풍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통산 714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역대 메이저리그 3위에 올려져 있다. 하지만 1920년대에 루스가 남긴 홈런 기록은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920년과 1927년에 루스가 기록한 홈런 숫자는 아메리칸리그 총 8개팀 중 나머지 7개 팀의 팀 홈런 숫자보다 많았다는 사실이다. 1920년에 루스가 54개 홈런을 기록한 것에 비해 세인트루이스가 50개의 팀 홈런을 기록하여 양키스를 제외한 나머지 7개 팀보다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1927년에 60개의 홈런을 기록한 루스에 비해 (양키스를 제외한) 가장 많은 팀 홈런 숫자를 기록한 팀은 필라델피아로써 총 56개였다.

이후 양키스에는 또 다른 괴물타자, 헨리 루이스 게릭(Henry Louis Gehrig=루 게릭)이 신인으로 입단하여 루스와 ‘공포의 살인타선’을 구축했다. 게릭은 칼 립켄(前 볼티모어)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연속경기 출장기록(2,130경기)을 보유하고 있어 강인함의 상징인 ‘철마(The iron horse)’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게릭은 500홈런 - 3000안타 - 2000타점 기록을 눈앞에 두고 한창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희귀병 발병으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홀쭉한 몸을 이끌고 은퇴경기에 나섰던 게릭은 은퇴사에서 “오늘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아일 것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겨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의 끊임없는 투병생활은 은퇴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한 번 걸린 병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서른 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함으로써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직까지 현대의학으로도 치료하지 못하는 ‘불치의 근육병’을 일컬어 후에 ‘루게릭병’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놈!놈!놈!(2) : 타자들의 전국시대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이후 양키스에는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떼를 지어 등장하기도 했다. 미키 맨틀, 조 디마지오 등을 포함하여 로저 매리스, 요기 베라 등이 1960년대 양키스를 이끌었다. 이때부터 양키스를 빗댄 표현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마이너리그 유망주 중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대성할 수 있는 선수를 일컬어 ‘양키감’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를 일컬어 ‘양키스의 자랑이 될 만한 선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비단 양키스에서만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었다. 다른 팀에 속해 있었어도 “야, 저 친구 양키스에 있었다면 양키스의 자랑이 될 만한 선수가 됐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타자들이 양키스에만 몰려있던 것은 아니었다. 세인트루이스의 스탠 뮤지얼을 포함하여 보스턴의 테드 윌리엄스 또한 1950~1960년대를 풍미한 강타자였다.

스탠 뮤지얼의 정교한 타격은 다른 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일례로 그의 별명 ‘The man’은 다저스팬에 의해 생겨났는데, 다저스타디움에서 몸을 풀고 있는 뮤지얼에게 한 다저스팬이 “이럴수가! 그가 또 왔어!(There's the man again!)”라고 한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이 최고의 타자라고 손꼽는 테드 윌리엄스는 ‘최후의 4할 타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트리플 크라운’을 두 번이나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여섯 번의 타격왕, 네 번의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또한 그는 참전용사로써 국가를 위해 두 번이나 목숨을 내놓기도 했다. 한 번은 2차대전, 또 다른 한 번은 바로 6.25 전쟁이다. 공군 파일럿 교관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던 그는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 속에서도 무사히 귀국하여 통산 홈런 521개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만약에 그가 자진참전을 하지 않았다면 700홈런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표하기도 했다.

요기 베라는 명 포수이자 명감독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수많은 어록을 남겨(일명 Yogism) 많은 야구인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는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명언은 그 중 가장 유명하다.



▲ 테드 윌리엄스는 자신의 마음대로 야구해도 도(道)를 벗어나지 않았던 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1950년대의 가장 큰 사건은 브루클린에서 일어났다. 이전까지만 해도 백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그라운드에 흑인 선수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 바로 재키 로빈슨의 등장이다. 브루클린 다저스(現 LA 다저스)는 1947년, 로빈슨을 경기에 투입시켰는데, 이는 야구계의 반발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세이프 판정에도 아웃을 선언하고, 볼카운트에서 고의적으로 불리한 판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이를 묵묵히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결국 그는 1947년 신인왕에 오름으로써 주위의 소음을 실력으로 잠재웠다.

다저스 역시 그가 활약했던 10시즌동안 6번의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했다. 로빈슨은 또한 19번의 홈스틸 성공으로 득점을 올린 것을 비롯하여 1949년 최우수 선수(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했던 ‘양키 클리퍼’ 조 디마지오의 활약도 대단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하여 3년간 선수생활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1943~45) 통산타율 0.325를 기록하는 등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써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는 또한 단일시즌 56경기 연속 안타 신기록도 지니고 있을 만큼 기복없는 선수였다. 좀처럼 삼진을 당하지 않았던 그는 뛰어난 선구안으로 많은 볼넷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명예의 전당 헌액선수’보다는 ‘한 여자의 남자’로써 남기를 원했다.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가슴아파했던 그는 그녀와의 재혼 직전에 먼로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하자 죽을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의 무덤에 찾아가 헌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먼로를 죽음으로 몬 것은 유명 정치인들이라 하여 그들과의 동석을 끝내 거부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놈!놈!놈!(3) : 행크 아론에서부터 알렉스 로드리게즈까지

1960~80년대에는 두 명의 거포가 등장했던 시기였다. 역대 홈런기록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행크 아론(통산 755홈런)과 588홈런의 프랭크 로빈슨 등이 그러했다. 1954년 데뷔에서부터 1976년 은퇴 전까지 단 한 번도 두자릿수 홈런을 놓친적이 없었지만, 그가 실제로 차지했던 홈런왕 타이틀은 네 번이었다. 홈런 755개라는 숫자는 결국 꾸준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던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신시네티 기관총 타선’도 1970년대에 등장했다. 조 모건, 피트 로즈, 토니 페레즈, 자니 벤치, 켄 그리피 시니어, 조지 포스터, 데이브 콘셉시온, 세자르 제로니모 등이 버텼던 당시 타선의 빈틈없음은 두말 할 나위 없으며, 이들 중 세 명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려져 있다. 도박사건으로 야구계에서 영구 추방된 피트 로즈가 빠졌지만, 그는 역대 메이저리그 최다안타 1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 외에 1980년대 네셔널리그 3루를 주름잡던 필라델피아의 마이크 슈미트는 여전히 역대 최고의 3루수로 인정받고 있으며, 가장 최근에 은퇴한 ‘명예의 전당 홀더’인 칼 립켄 주니어, 토니 그윈 등도 한 시대를 풍미한 타자들이다. 특히 립켄은 루 게릭이 보유한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경신하여 ‘철인(The iron man)’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특히, 2001 시즌 올스타전에서는 박찬호를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 립켄은 루 게릭의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2,632경기로 경신한 철인 중의 철인이었다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 대결 또한 최근의 일이다. 메이저리그 파업으로 팬들이 발길을 끊은 야구장에 이 둘의 홈런쇼가 있었기에 다시금 메이저리그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두 선수의 세기의 홈런 대결은 1988, 1999년 모두 맥과이어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후 소사는 2000, 2002시즌 홈런 타이틀을 차지하며 이에 응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선수의 홈런 대결에는 뜻하지 않은 변수로 야구계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맥과이어는 은퇴 이후 약물파동에 휩싸인 것을 비롯하여 소사는 이른바 ‘코르크 방망이’ 사건으로 한때 곤욕을 치루었기 때문이다. 이후 두 선수는 나란히 내리막길을 걸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졌다. 맥과이어는 벌써 4년째 명예의 전당을 노크하고 있지만, 약물 파동 사건은 그의 입성을 허락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이는 맥과이어보다 조금 늦게 은퇴한 소사에게도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은퇴 직전까지 609홈런을 기록하여 이 부문 역대 6위에 올려져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베리 본즈 또한 안타까운 케이스다. 그는 선수시절에 무려 7번의 MVP를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두 번의 타격왕과 두 번의 홈런왕 타이틀을 치자했다. 또한 타자로써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OPS(출루율+장타율) 10할 이상을 13번이나 기록한 것을 비롯하여 500도루까지 기록하여 역사상 최초로 500(홈런)-500(도루) 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대 홈런 1위라는 기록이 약물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심을 비롯하여 위증 혐의가 추가되자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그를 외면했다. 그 역시 맥과이어의 전례에서처럼 명예의 전당 입성 거부자로 이름이 오를것이 확실시 된다. 피트 로즈가 최다 안타 1위를 기록하고도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 것을 비롯하여 그 역시 최다 홈런을 기록하고도 ‘상처뿐인 영광’만을 남긴 채 쓸쓸하게 퇴장했다.

약물 파동이라는 한 차례 홍역을 치룬 이후 선수들, 특히 타자들을 바라보는 기준이 하나 더 생겨났다. 바로 도덕성이다. 물론 대부분의 선수가 이에 자유로우나, 명예의 전당을 바라보는 선수들은 그만큼 조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알렉스 로드리게즈, 알버트 푸홀츠, 매니 라미레즈, 데릭 지터, 캔 그리피 주니어, 짐 토미, 프랭크 토마스 등은 추후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후보군으로 꼽힌다.

[사진(C) = Baseball Hall of Fame 공식 홈페이지 캡쳐]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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