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5-1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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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 토크] (17) '무관의 챔피언' 브라질 드림팀 2기

기사입력 2010.03.05 00:07 / 기사수정 2010.03.05 00:07

박문수 기자

[엑스포츠뉴스=박문수 기자] 지난 삼바 토크 16편에서는 브라질 역대 최고의 드림팀 불린 1970 멕시코 대회에 나선 대표팀에 대해 알아봤다. 그들은 펠레를 주축으로 자이르지뉴, 토스탕, 히벨리누, 제르손, 클로도알도 등을 앞세워 이탈리아를 결승에서 4-1로 제압. 통산 3번째 월드컵 우승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번 삼바 토크 17편에서는 8강 리그에서 이탈리아에 패하며 탈락했지만, 경기 내용과 선수 면에서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히는 1982 스페인 대회 텔레 산타나의 브라질에 대해 알아보자.

펠레의 부재가 컸던 브라질

지난 삼바 토크를 통해 말했듯이 브라질 축구의 역사는 펠레의 등장 전, 후로 나눌 수 있다.

펠레는 축구 선수가 갖춰야 될 모든 것을 지닌 완벽한 포워드였으며 브라질이 줄리메 컵을 영구 소유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또한, 비센트 페올라와 마리아 자갈로가 이끈 브라질에서 에이스 역할을 훌륭히 소화하며 동료의 능력까지 한 단계 상승시켰다. 이는 호나우두, 호마리우, 가힌샤 등을 제치고 그가 왜 브라질 최고의 축구 선수인지를 입증한다.

문제는 펠레의 은퇴 후였다. 브라질은 역대 최고의 전력으로 월드컵 우승에 성공했지만, 35세의 노장 펠레는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대표팀을 위해 뛰지 않을 것으로 밝혔다. 게다가 하얀 펠레로 불리며 전 대회 우승 주역인 토스탕이 망막 병리 때문에 26세란 젊은 나이로 은퇴를 선언하며 위기에 처한다. 자이르지뉴와 히벨리누는 건재했지만, 펠레와 토스탕이 없는 공격진은 누수가 컸다.

결국, 브라질은 유고슬라비아, 스코틀랜드, 동독을 상대로 2승 1무를 기록하고 토너먼트에 진출하고, 아르헨티나에 2-1로 승리했음에도 당대 최고의 팀이었던 요한 크라이프의 네덜란드에 1-2로 패하며 대회를 3위로 마감한다. 좋은 경기력으로 팬들을 즐겁게 했지만, 전 대회에 비하면 2% 부족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후,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나선 브라질은 조별 예선에서 스페인, 오스트리아, 스웨덴를 간신히 따돌리며 2차 리그에 진출했다. 대회 직전 우승 후보로 꼽힌 브라질이 무기력하게 1승 2무로 결선 리그에 오르자 당시 대표팀 감독인 카우치뇨 감독에 대한 불신도 커졌으며 자국 대통령까지 나서며 브라질의 선전을 부탁했다. 결국, 2차 리그에 진출한 브라질은 페루와 폴란드를 각각 3-0, 3-1로 제압. 결승 진출에 한발 다가선다.

브라질과 같은 조인 아르헨티나는 헝가리와의 개막전부터 편파 판정의 수혜자가 되며 승승장구했다. 게다가 브라질이 2차 리그 최종전에서 폴란드에 3-1로 이겼을 때, 아르헨티나가 페루를 4점 차 이상으로 이겨야 결승에 진출하는 경우가 발생했는데,  그들은 페루를 6-0으로 제압하는 이변을 연출한다.

이 때문에 페루가 아르헨티나에 거액을 받았을 것이라는 내용이 일파만파로 퍼졌으며 현재까지 그들은 껄끄러운 챔피언이 됐다. 즉,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원했던 비델라가 2년 전 쿠데타 끝에 정권을 장악한 사실을 월드컵 우승으로 바꾸고자 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상처를 딛고 강호로 도약한 브라질

아르헨티나 대회 이후, 브라질은 기존의 CBD를 브라질 축구 연맹(CBF)으로 바꾸며 개혁을 시도한다. 게다가 지코와 레안드로가 이끄는 플라멩구가 세계 클럽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팔카우, 스코르테스, 토니뇨 세레조로 대표되는 황금 4중주가 탄생한다.

브라질은 1982 스페인 대회 우승후보로 부상했으며 그들의 통산 4번째 우승이 당연해 보였다. 게다가 오늘날의 4-4-2의 창조주로 불리는 텔레 산타나 감독의 지도력 역시 절정이었다. 감독과 선수 모두 최고였던 브라질은 결과적으로 파울로 로시에 무릎을 꿇었지만, 경기력 면에서는 역대 최고였다.

우선, 브라질 드림팀 2기에 말하기 전에 당시 축구의 흐름을 알아보겠다. (이 부분은 사커라인의 필진이자 국내 축구 전문가인 이형석 씨가 지은 ‘현대 축구의 전술, 알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를 참고했다. 이 책은 축구의 재미를 더해주며 전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80년대는 스탠딩 윙으로 불리는 전통적인 측면 미드필더의 역할이 변했다. 즉, 좌우 풀백이 직접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며 윙과의 포지션 변경을 통해 서로의 공간을 메워주는 형태의 전술 안이 등장했다. 게다가 토탈사커 때문에 전면적인 압박이 활성화됐으며 1대 1 대인 방어보다는 지역 방어의 형태가 발전했다. 기존의 베컨바워 같은 수비 맨 끝에 있는 리베로의 개념은 사라졌지만, 수비진 바로 위에 꼭짓점으로 위치하며 공격의 빌드업 과정을 이끄는 수비형 미드필더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텔레 산타나 체제의 브라질은 어떠할까? 

 

당시 브라질의 주전은 황금 4중주로 불리는 지코, 소크라테스, 팔카오, 토니뇨 세레조가 미드필더를 구성하며 투톱에는 에데르와 세르지뉴가 나섰다. 포백은 주니오르, 루이시뇨, 오스카, 레안드로가 담당하며 골키퍼는 페레스였다.

우선, 산타나의 브라질은 공격과 수비 과정에서 포지션이 달랐다. 공격 상황에서 지코를 공격적인 위치로 올리면서 측면으로 빠지게 하면서 소크라테스를 중앙에 배치한다면 수비 상황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역할을 지코가 담당하며 소크라테스, 팔카오가 중앙 미드필더를 세레조가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았다.

단, 산타나가 지향했던 브라질은 공격 축구의 주안점을 두는 것으로 좌우 풀백이 1970년 대표팀보다 더욱 오버래핑을 시도했으며 그들의 공간을 메우는 데 문제점이 생겼다. 그럼에도, 내로라하는 강팀을 모두 격파하며 대회 직전까지 승승장구했던 브라질이기 때문에 한 골을 먹이면 두 골을 넣는다는 철학에는 의심이 없었다.

좀 더 세분화하자면 최전방에 세르지뉴는 오늘날의 포워드와 같이 포스트 플레이에 주력하며 득점력이 높은 지코와 소크라테스에게 공간을 열어준다. 자신이 직접 골을 넣기보다는 체격적인 이점을 활용하며 동료에게 연결해주는 것이다. 측면의 에데르는 빠른 발을 이용해 상대의 우측 수비를 허물었으며 반대편의 지코는 공격을 지휘하며 상대의 좌측 수비를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실질적으로 2명의 중앙 미드필더의 역할을 맡은 팔카오와 세레조는 공수양면에서 활발히 움직였으며 활동 영역이 넓었기 때문에 강인한 체력을 요구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세레조가 더욱 수비적인 역할을 부여받았다면, 팔카오는 과거 제르손과 같이 상대적으로 공격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수비진은 지역방어를 선택했으며 오늘날과 같이 중앙 수비가 세트 피스 상황에서 직접 득점에 가담했기 때문에 생긴 공간이 상대에 실점을 제공했다. 즉, 미드필더까지 완벽했던 이 팀은 상대적으로 부진한 수비진 때문에 대회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럼에도, 황금 4중주가 보여줬던 창의적인 패스와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의 전개는 매우 무서웠다.

대회에 나선 브라질은 소련, 스코틀랜드, 뉴질랜드를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꺾으며 8강에 진출한다. 현재와 달리 당시 8강전은 3팀이 리그전을 펼쳤으며 이 중 가장 성적이 좋은 팀이 4강에 진출했었다.

브라질은 8강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에 3-1로 완승을 한다. 79년 도쿄에서 열린 청소년 대회에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끈 디에고 마라도나도 당시 산타나가 이끄는 브라질 앞에서는 초라하게 무너졌다. 게다가 종료 직전에는 불필요한 파울로 퇴장을 당했다.

한편, 이 경기에서 브라질이 보여준 득점 루트는 간단했다. 첫 번째 득점은 프리킥에서 나왔으며 에데르가 찬 공이 골대를 맞고 나오자 쇄도하던 지코가 차분히 마무리했다.

두 번째 득점은 역습 상황에서 나왔다. 아르헨티나가 중원에서 공을 제대로 걷어내지 못하자 공격수 세르지뉴가 이를 가로챘으며 에데르, 지코, 팔카오로 이어진 패스가 세르지뉴의 머리에 맞으며 득점으로 연결됐다. 모든 선수가 공격 과정에서 활발히 움직인 성과였다. 세 번째 득점은 세르지뉴가 머리로 떨어뜨려 준 공을 받은 지코가 문전으로 쇄도하던 과정에서 상대 반칙 때문에 넘어졌을 때, 오버래핑하던 좌측 풀백 주니오르의 강력한 오른발 중거리 슈팅에서 나왔다.

이로써 브라질은 4년 전 아르헨티나의 독재 정권에 빼앗긴 억울한 패배를 막강한 화력으로 복수했다.(당시 경기에서 양 팀은 0-0으로 비겼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패배는 페루와의 경기 이후, 급변한 상황을 말한다)

하지만, 2차 라운드 마지막 경기 이탈리아전은 상황이 달랐다.

바르셀로나의 세리아 경기장에서 열린 이날 경기는 2년 동안 경기 출장이 금지됐던 파울로 로시의 해트트릭에 브라질이 무너졌다. 로시의 활약도 좋았지만, 젠틸레에게 지코에 대한 전담 마크를 지시했으며 브라질의 후방 수비가 공간이 많은 것을 활용한 베아르조트 감독의 전술적 안목이 돋보였다.

이날 브라질은 공격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의 골문을 노렸지만, 오히려 경기 시작 5분 만에 가브리엘 오리알리와 안토니오 카브리니로 이어진 패스를 놓쳤으며 이를 차분히 득점으로 마무리한 로시에 자신의 허점을 노출했다. 브라질은 소크라테스가 강력한 중거리 슈팅에 성공하며 동점을 만들었지만, 수비수의 실책이 로시에게 연결됐고 이를 또 다시 득점으로 연결하며 역전을 허용했다.

기존의 브라질이 강력한 공격력으로 상대를 압도했다면, 이날 브라질은 모든 문제점을 노출하며 이탈리아에 완벽하게 당했다. 이후, 팔카오가 주니오르의 패스를 받아 득점으로 연결하며 동점을 만들었지만, 로시가 결승 득점을 넣으며 분위기를 뒤집지 못했다. 브라질은 전원 공격이란 총 공세를 펼쳤음에도 이탈리아의 수비에 패하며 무릎을 꿇었다.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한 82 브라질 대표팀은 대회에서 탈락했으며 12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노렸던 꿈도 무너졌다. 산타나의 전술이 오늘날 공격 축구의 표본이 된 점은 좋았지만, 무관의 챔피언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그럼에도, 브라질 국민은 이들이 보여준 화끈한 축구에 대해 아직도 좋게 평가하고 있으며 지금은 세상을 떠난 텔레 산타나의 4-4-2는 오랜 기간 축구계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관련 기사] ▶[삼바 토크] (16) 브라질 최고의 드림팀 1기, 1970 대표팀

[사진= 피파가 선정한 최고의 클래식 매치 중 1982 브라질 대 이탈리아 ⓒ 국제 축구연맹 공식 홈페이지 캡쳐]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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