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김근한 기자) 베이징 영웅에 영구결번 은퇴까지. 탄탄대로였던 국민타자 인생에 이런 시련이 있었을까.
두산 베어스 이승엽 감독이 팀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를 선택했다. 이 감독의 첫 프로 지도자 생활이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이 감독은 지난 2일 오후 잠실구장을 갑작스럽게 방문해 자진 사퇴 의사를 구단 수뇌부에 전했다.
두산은 올 시즌 23승 3무 32패로 리그 9위까지 떨어졌다. 부임 3년 차를 맞이한 이 감독이 성적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난 주말 최하위 키움 히어로즈와의 맞대결에서 2경기 연속 충격적인 0-1 영봉패를 당한 여파도 컸다.
사실 이 감독은 실패와는 거리가 먼 야구 인생을 살아왔다. 현역 시절 그는 누구보다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했다.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이 감독은 KBO리그 통산 1906경기 출전, 2156안타, 464홈런, 1498타점으로 KBO를 대표하는 레전드 타자 반열에 올랐다.
1999년에는 KBO 단일 시즌 최다 홈런(54개) 기록을 세웠고, 2003년에는 56홈런으로 당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경신하며 2004년 일본프로야구(NPB) 무대에 진출했다.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일본 생활을 시작한 이 감독은 일본 전국구 인기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를 맡아 NPB 무대에서도 인상적인 활약상을 남겼다. 이후 이 감독은 오릭스 버펄로스를 거쳐 2012년 친정 삼성으로 복귀했다. 통합 3연패와 정규시즌 4연속 우승에 기여한 이 감독은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2017년 현역 은퇴 당시 삼성은 그의 등번호 36번을 구단 최초로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고, 야구 팬들은 ‘영원한 4번 타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 감독은 태극마크를 달고도 한국 야구를 빛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 최초 올림픽 메달(동메달) 주역이 되더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준결승 한일전에서 극적인 결승 투런 홈런을 터뜨리며 금메달 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처럼 올림픽,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클러치 능력은 '국민타자'라는 별명을 더욱 굳건히 했다.
하지만 프로 지도자로서의 첫 도전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22년 두산은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끈 김태형 감독의 뒤를 이어, 지도자 경험이 전무한 이승엽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3년 총액 18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 아래 이 감독은 두산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를 기대받았다.
부임 첫해인 2023시즌에는 리그 5위로 팀을 2년 만에 가을야구로 이끌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NC 다이노스를 상대로 3-0으로 앞서다가 9-14로 역전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2024시즌 두산은 정규시즌 4위로 다시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진출했다. 2년 연속 가을야구를 이끈 이 감독은 더 높은 곳을 바라봤다. KT 위즈와의 시리즈에서 18이닝 연속 무득점이라는 참사 속에 와일드카드 결정전 사상 최초의 업셋 희생양이 됐다.
이 감독은 계약 마지막 해인 2025시즌을 앞두고 한국시리즈 진출을 목표로 절치부심했다.
그러나 개막 직전 주축 투수 곽빈과 홍건희의 부상, 외국인 선수 콜 어빈과 제이크 케이브의 부진, 고액 연봉 야수들의 침체가 겹치며 시즌 초반부터 팀은 끝없이 추락했다.
5월까지 반등에 실패한 이 감독은 결국 자진 사퇴를 택했다. 화려했던 현역 커리어와는 다른, 씁쓸한 지도자 데뷔전이었다.
이 감독은 현역 시절 누구보다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만큼 무거운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했다. 선수 시절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했지만, 다양한 구성원을 이끌어야 하는 프로 지도자의 길은 전혀 다른 무게였다.
물론 ‘국민타자’라는 이름 아래 쌓아 올린 명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감독으로서의 불명예스러운 퇴진은, 그에게 다시 일어서야 할 숙제로 남았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야구 인생이 아직 해나갈 일이 많은 40대 후반에 처음으로 좌초했다. 이 감독의 야구인생 '3막'이 어떻게 올라갈지 향후 관전포인트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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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한 기자 forevertoss88@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