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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감독이야?" 면박 당할 때 웃는 사람들 [김지수의 야구경]

기사입력 2023.02.02 07:00



(엑스포츠뉴스 김지수 기자) 통역(通譯)의 사전적 의미는 말이 통하지 아니하는 사람 사이에서 뜻이 통하도록 말을 옮겨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프로야구에서는 인터프리터(interpreter)보다 러닝 메이트(running mate)의 성격이 강하다. 외국인 선수와 1년간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울고 웃는 동반자가 된다. 

2월 1일을 기점으로 KBO 10개 구단이 해외 스프링캠프에 돌입하면서 각 팀 통역들 역시 봄부터 가을까지 숨 가쁜 일정을 함께 한다. 담당 외국인 선수와 시즌 내내 거의 매일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정이 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속을 썩이기도 한다. 

A구단 통역은 지난해 정규시즌 중 성적 부진으로 퇴출된 담당 외국인 선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 선수는 야구도 못했지만 멘탈적으로도 '애'였다.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물론 종종 팀 분위기를 깨는 일까지 발생했다.

구단은 결국 해당 통역에게 그라운드 안팎에서 외국인 선수 '밀착 마크'를 지시했다 통역 본연의 업무보다는 연예인 매니저에 가까운 일상을 한 달 가까이 보냈다. 이 선수가 한국을 떠났을 때는 묘한 해방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 선수-통역 간 '궁합', 적응·성적에도 영향 끼친다

각 구단 통역은 스프링캠프 시작 전 올 시즌 자신이 담당할 선수를 배정받는다. 선수에 따라 스페인어만 구사 가능하다면 스페인어 통역이 붙지만 영어를 쓰는 선수들은 팀별로 통역을 나누는 기준이 있다.

C 구단의 경우 타자보다 투수 쪽에 더 신경을 쓴다. 조금 더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 통역을 1선발로 영입한 외국인 투수에게 붙이는 식이다. 야수를 홀대한다기보다는 훈련과 미팅 과정에서 통역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이 타자보다 투수가 크기 때문이다. 

선수와 통역의 성향을 고려하는 경우도 있다. 거의 매일 얼굴을 보고 붙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성격과 라이프 스타일이 비슷하면 선수의 한국 적응에도 큰 도움이 된다.

2020~2021년 롯데 자이언츠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던 딕슨 마차도의 경우 담당 통역과 영혼의 파트너가 됐다. 마차도와 2년간 함께한 지승재 통역(현 LG 통역)과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을 쌓았고 경기장 밖에서도 자주 시간을 보냈다. 



지승재 통역은 "선수와 통역이 서로 죽이 잘 맞으면 선수가 야구 혹은 야구 외적으로 힘들 때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풀리는 것도 조금은 있다"며 "마차도는 워낙 팀원들과 잘 어울리고 상황 판단도 빠른 친구였다. 나에게는 쉬는 날도 같이 놀자고 할 때가 많았다. 서로 성향이 잘 맞아서 그런지 잘 지냈고 지금도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다"고 설명했다.

2015-2018 시즌 SK(현 SSG)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메릴 켈리 역시 자신의 통역과 '아삼육'이 됐다. 2018년 2월 미국에서 올린 자신의 결혼식에 통역을 따로 초대할 정도였다.

래리 서튼 롯데 감독,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감독도 자신의 담당 통역과 사이가 각별하다. 네 사람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공통점까지 있어 야구 외적으로도 대화가 잘 통하는 것도 한국 생활에 큰 힘이 되고 있다. 

◆ '쓴소리' 통역은 난감, 하지만 '직역'이 정답이다

좋은 얘기만 주고받는다면 업무 과정에서 큰 어려움이 없겠지만 사회 생활과 마찬가지로 프로야구 역시 누군가는 쓴소리를 하는 때가 있다. 이 쓴소리가 외국인 선수를 향한다면 통역이 중간에서 코칭스태프, 프런트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전달해 줘야 한다.

여기서 빠지면 안 되는 함정은 통역이 표현을 순화하거나 포장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선수의 기분이나 관계 악화를 우려해 표현을 바꾸다 보면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ㄱ 통역은 "질책이나 쓴소리는 필터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게 맞다. 예를 들어 '나는 저 사과가 먹고 싶다'라고 코치가 선수에게 얘기했는데 통역이 '저 사과가 맛있게 보인다'라고 선수에게 전달하면 안 되는 것처럼 듣는 사람 기분을 생각해서 원문에 손을 대면 커뮤니케이션 미스가 나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코칭스태프들은 아예 통역에게 자신과 같은 목소리 톤, 감정으로 선수들에게 이야기해 줄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ㄴ 통역은 외국인 코치가 선수에게 호통을 칠 때 차분한 어조로 선수에게 전달했다가 외려 통역 자신이 질책을 당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코칭스태프의 요구를 성실하게 이행하면 반대로 국내 선수들에게 원성을 듣는 경우도 생긴다. ㄴ 통역은 "선수가 나중에 따로 찾아와 이미 코치가 화가 났다는 걸 알고 있는데 당신까지 꼭 그렇게 소리를 질러야 하느냐고 서운함을 내비칠 때는 난감하기도 하다"고 끼인 입장의 비애를 설명했다. 



◆ 난이도 'S'는 외국인 감독 통역, 판정 항의 상황이 가장 난감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외국인 선수-코치-감독 중 통역들에게 가장 어려운 대상은 역시 감독이다. 감독 통역은 팀 운영, 선수 기용, 면담, 코칭스태프 미팅 등 무거운 주제로 대화할 때가 많다. 시즌 중 경기 전에는 항상 사전 공식 인터뷰가 있기 때문에 팀 상황과 리그 이슈 전반에 대한 파악도 꼼꼼하게 해야 한다.

타 프로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V리그 대한항공의 정재균 통역은 2020-2021 시즌 남자부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 산틸리 감독과 1년간 호흡을 맞췄다. 이후 지난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통역을 맡고 있는 가운데 "선수 통역 업무가 쉬운 건 절대 아니지만 감독님 통역으로 일하는 게 더 어려운 게 사실이다"라고 강조했다. 

통역들이 가장 난처할 때는 판정 문제로 외국인 감독과 심판들의 언쟁이 발생할 때다. 이때 통역의 역할은 '중재'가 아니라 감독의 목소리를 심판에 확실히 전달하는 것이다. 

맷 윌리엄스 전 KIA 감독(2020-2021)의 통역을 맡았던 구기환(현 스포츠인텔리전스 차장) 씨는 "감독님이 판정 문제로 어필하는 상황이 가장 어렵다. 통역들도 집중해서 게임을 지켜봐야 감독님이 왜 항의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통역할 수 있다"며 "이 상황에서 통역이 중재하려고 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감독과 심판 사이에서 서로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이 부분을 가장 신경 썼다"고 설명했다.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감독과 호흡을 맞추는 이현재 통역도 "감독님이 항의를 하실 때 말하고 있는 부분을 담대하게 그대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감독님의 어조, 감정까지 통역하려고 노력했다"며 "한번은 어떤 심판분께서 내게 '당신이 감독이야'라고 뭐라고 하셨던 적도 있다. 그래도 나는 뿌듯했다. 내가 일을 제대로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고 웃었다.



◆ 고되고 힘들지만 야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프로 스포츠 관련 직업들 대부분이 비슷하겠지만 통역 역시 밖에서 보이는 화려함보다 현실의 열악함이 더 크다. 시즌 중 월요일을 제외하면 개인 시간을 가지기가 쉽지 않고 휴식일마저도 담당 외국인 선수의 한국 생활 관련 업무에 도움을 주다 보면 '주 6.5일 근무'도 흔하다.

고용 불안도 항상 존재한다. 보통 통역은 1년 계약직이기 때문에 시즌이 끝나면 당장 내년 거취를 걱정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딛기도 어렵지만 계속 버티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러나 수많은 고충에도 통역들 대부분은 유니폼을 입고 더그아웃에서 선수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자체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승재 통역은 "프로야구팀에서 선수들과 시즌을 치르고 눈앞에서 경기를 지켜볼 수 있는 게 정말 매력적이다. 스포츠를 좋아하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즐겁게 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엑스포츠뉴스 DB/지승재 LG 트윈스 통역 제공/연합뉴스

김지수 기자 jisoo@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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