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5-0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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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월드컵 개막의 휘슬 소리.

기사입력 2006.01.31 08:09 / 기사수정 2006.01.31 08:09

편집부 기자
단 세 번의 대회를 치렀을 뿐이었지만, 월드컵의 눈부신 성장과 발전 그리고 전 세계인의 폭넓은 지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힘겨운 첫 발을 뗐던 우루과이 월드컵은 '전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스포츠'에 가능성을 던져 주었고, 이어 열린 이탈리아와 프랑스 월드컵은 축구공에 세계를 가두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던 월드컵도 전쟁의 상흔 앞 에선 어쩔 수 없었다. 1942년에 열렸어야 할 네 번째 월드컵은 세계 제2차 대전의 발발로 인해 무려 12년의 세월이 흐른 1950년에 가서야 개최될 수 있었다. 월드컵의 고속성장을 전쟁이 가로막고 말았지만, FIFA와 축구를 사랑했던 세계는 전쟁의 아픔을 뒤로하고 다시 축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전 세계인이 12년 만에 열리는 월드컵의 개막에 열광하던 1950년 6월 24일 오후 4시는 한국 시각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민족의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기억되는 6.25가 발발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제4회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개최 배경

▲ 브라질 월드컵 포스터
ⓒ fifaworldcup.com
1938년 FIFA(국제 축구 연맹)는 파리에서 총회를 열고, 1942년에 열릴 제4회 대회의 개최국을 선정하기로 했다. 당시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독일이 유치 신청서를 냈었지만, 전쟁의 위기감으로 인하여 결정을 미룰 수 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3회 대회의 개최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아픔을 씻기 위해서였고, 브라질은 축구에서 세계 최고의 위상을 얻고자 월드컵 개최에 도전했었다. 하지만, 세계 2차 대전의 발발로 월드컵은 세계인의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 갔고 이들의 월드컵 개최의 꿈은 무려 8년의 세월이 흐른 1948년에 가서야 결정되었다.

1946년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FIFA 총회는 8년 전에 해야 했을 결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열렸다. FIFA는 빠른 시일 내에 월드컵을 다시 정상화시키고 싶었지만, 축구의 중심인 유럽을 포함한 거의 모든 국가가 세계 대전의 상흔이 크게 남아 있어 4년 뒤인 1950년에 제4회 대회를 개최키로 하고 개최국을 찾아 부심했다.

하지만, 유럽의 그 어느 나라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월드컵을 개최하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전쟁의 피해가 가장 적었던 남미, 그중에서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만이 유치신청을 했었다. 지난 1938년 유치신청을 했던 독일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월드컵을 개최할 능력도 없었지만, 전쟁의 도발국으로 지정되어 FIFA로 부터 개최는 물론 참여자격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남미의 라이벌이자 축구계의 양대 산맥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유치 경합은 애초 대단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월드컵 개최가 남미 국가의 No. 1을 가리는 대리전의 양상을 띠었고, 축구를 넘어 정치 경제 등 국가 전반적인 이미지 상승에도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합을 넘어 치열한 유치 전쟁까지 예상했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대결은 의외로 쉽게 브라질의 승리로 돌아갔다.

브라질이 큰 출혈 없이 월드컵 개최권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은 FIFA가 아르헨티나에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제3회 대회의 개최를 프랑스에 내주자 FIFA에 강한 불만을 품고 월드컵을 불참하며 FIFA에 대항하였다. 결국,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철 없었던 행동이 두 대회 연속 개최 경쟁에서 지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또다시 월드컵에 불참했고 이후 아르헨티나는 독일과 함께 FIFA에 '문제국'으로 낙인 찍혀버렸다.

▲ 공식적으로 22만 명이 입장할 수 있는 마라카나 경기장
ⓒ fifaworldcup.com
▲월드컵 뒷얘기

-전쟁의 후유증으로 월드컵 대거 불참.

세계대전의 후유증이 너무나도 컸던지라 많은 나라는 자국의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기에 급급했고, 다른 곳으로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예선 참가를 희망했던 34개 나라 중 하나 둘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4개국이나 예선에 불참하기에 이르렀다. 남미의 아르헨티나 에콰도르가 그러했고, 유럽의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도 그 뒤를 따랐다.

또, 세계 대전의 가장 심한 물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아시아도 모든 국가가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하는 심각한 사태까지 오게 되었다. 하여 16개 나라가 본선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본선 진출국 가운데서도 3개 나라가 불참해 13개국이 비대칭적인 대회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토리노의 악몽, 비행기 대참사.

1949년 5월 4일 오후 5시 5분. 토리노 근교의 수페르가(Superga) 언덕에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비행기에는 벤피카와의 원정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토리노 클럽 선수들이 타고 있었고, 토리노는 팀 선수 전원을 잃어야 했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토리노는 이 사고를 계기로 막을 내려야 했었고, 대표 선수가 무려 8명이나 포함되어 있던 이탈리아 축구계도 큰 고통에 잠기고 말았다.

'헤이젤의 참사'와 더불어 세계축구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 사고로 월드컵 참가가 불투명했던 이탈리아는 더는 슬픔에 잠겨있지 않고, 남아 있는 선수들을 추스려 월드컵에 참여하는 스포츠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는 지난 시절 나치즘으로 월드컵을 얼룩지게 했다는 이탈리아에 대한 비난을 상당 부분 진정시키는 효과를 불러왔다.

-조용히 건네받은 우승컵.

대망의 월드컵을 차지하고도 우승의 기쁨을 표현하기는커녕, 표정마저 굳어야 했던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우루과이 대표팀이었다.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브라질을 2-1로 이기며 우승컵을 차지한 우루과이는 기쁨의 표현과 환한 웃음 대신 무표정하고 잔뜩 긴장 된 얼굴로, 줄리메가 수여하는 트로피만 받고 황급히 경기장을 빠져 나왔다.

공식 수용 능력 약 18만 명, 입석까지 하면 20만 명을 훌쩍 넘긴다는 리오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나 경기장엔 무려 25만 명(비공식)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브라질 팬들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폭동을 일으킬 분위기였다. 우루과이는 예선에서 단 한 경기만(본선 참가국 중 3개국의 불참으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와 예선 단 한 경기만 치르고 결승리그 진출) 치르고 결승리그에 안착해, 이런 우루과이가 우승컵을 차지한 것에 대한 브라질 국민의 불만이 대단했었기 때문이었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의 화려한 외출, 그러나...

자동 출전권을 보장받으며 화려하게 월드컵에 데뷔했던 축구 종가 잉글랜드. 예선 첫 경기였던 칠레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완승을 거두며 한껏 콧대를 세웠던 잉글랜드는 예선 두 번째 상대인 미국과 마지막 상대인 스페인에 0-1의 어이없는 연패를 당하며 1승 2패로 예선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축구 종가의 자존심을 구긴 것. 이후 FIFA는 잉글랜드도 지역 예선을 치르도록 권고했고, 잉글랜드도 조용히 그 요구에 따랐다고 한다.

◆대회 기록

*대회 기간 : 1950.6.24 - 1950.7.16(23일간)

*참 가 국 :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잉글랜드, 이탈리아, 멕시코, 파라과이,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우루과이, 미국, 유고슬라비아 (스코틀랜드, 터키, 인도는 예선전을 통과했으나, 본선 참가를 포기함)

*개최 도시: 리오데자네이루, 상파울루 등 7개 도시

*총 득 점 : 88골, 평균득점 4.00골

*총 관 중 : 1,337,000명, 평균관중 60.773명

*득 점 왕 : 아데미르(9골·브라질)

*결 승 전 : 우루과이 vs 브라질( 2 : 1, 우루과이 우승)


전쟁의 상처를 딛고 12년 만에 치러진 브라질 월드컵은 대회 운영이 힘겨운 상황에서도 13개국이 참가하고 무려 1백33만7천 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식지 않은 월드컵의 인기를 과시했었고, 서로를 향해 총과 칼을 겨누었던 세계를 하나로 화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대회였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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