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5-29 04:48
스포츠

야구, 어떻게 日 최고 스포츠가 됐나①

기사입력 2012.06.05 09:51 / 기사수정 2012.06.05 10:06

서영원 기자
[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한국 프로야구 30년 역사의 ‘롤모델’은 일본 프로야구(NPB)다. 아픔의 역사를 싣고 있는 개항기에 도입된 야구가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을 맞이하기 까지 제도적, 스포츠적 '모티브'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장훈, 백인천 등 재일동포 출신 야구인들은 한국 프로야구 창설에 지대한 역할을 해냈다. 이들은 선수 수급과 리그의 틀을 갖추는 데 아낌없는 도움을 줘 지금의 프로야구 틀을 갖추는데 공헌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구단, 선수간 교류, 국제대회 활성화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한-일 프로야구는 이제는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한국프로야구는 90년대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등 한국프로야구 출신이 일본 무대를 밟는 것을 시작으로 서로간의 격차를 미약하나 줄이고 있다. 또 야구인들의 노력으로 일본식 용어를 줄이며 한국적인 야구 색깔을 갖춰가고 있다.

최근 미디어의 활성화로 장훈부터 이대호까지, 또 개항기부터 현재까지 꾸준한 교류의 대상인 일본 야구가 재조명되고 있다. 일본 구단의 사례, 역사 등이 한국에 소개되고 있다. 야구가 왜 일본 최고의 스포츠가 됐는지, 역사적 특성과 야구의 ‘스토리’화와 함께 한국프로야구와 얼마나 닮았는지 알아봤다.





- 일본의 '넘버원' 스포츠 야구, 그리고 역사적 특성

지난 해 프로야구 총 관중 2,100만명이 경기장을 찾았고 고교야구 관중 84만명을 기록하는 등 문화적 파급효과가 높은 일본야구는 프로야구 뿐만 아니라 고교야구, 사회체육까지 넓은 저변을 확보하고 있다. 약 1억 5천만명의 인구와 세계 경제 3위의 내수시장에 힘입어 야구는 활성화됐다. 

프로야구를 즐기는 팬, 순수 야구를 즐기는 사회인, 학생야구 등 피라미드 형식으로 기틀이 갖춰진 야구는 일본 내 프로스포츠 ‘넘버원’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인도 크리켓 리그 다음으로 시장가치가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일본의 야구 인기는 공통된 특성이 있는데 바로 ‘지역 기반’ 이다. 다른 말로 연고주의로 불리는 지역 기반은 역사적 특성에 찾아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전 시대까지 일본은 줄곧 지방 영주제를 택해 지역 거점의 기반을 택해 왔다.

오랜 시간 지방 영주(大名)를 중심으로 단결해 온 일본인들은 계급제와 지역간 경쟁을 통해 자부심과 오랜 연고를 가져왔다. 현재는 지방 분권은 아니지만 오랜 역사적 특징을 반영하듯 사회 각 분야에 뿌리내려 내수시장 활성화와 스포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야구는 1860년대 전파됐지만 처음에는 쉽게 인기를 얻지 못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규정과 함께 외세에 대한 거부감 등으로 오랜 시간 일본 거주 미국인, 혹은 일부의 일본인들만 즐기는 스포츠였다.

정부 고위 관료, 무역가 등 일부 엘리트 계층만 즐기던 야구는 50년의 시간을 정체하다 1910년대 급속도로 성장하는 계기를 맞이했다.




- 아사히 신문과 ‘코시엔’

1879년 창간된 아사히 신문은 일본 3대 신문으로 발돋움 하며 발전의 기회를 꾀하고 있었다. 당시 사장이던 무라야마 쿄헤이는 신문사의 발전과 체육 발전을 위해 고심 중이었다. 흔한 말로 창작의 고통을 겪던 그에 눈에 들어 온 것이 야구였다.

사실 그는 야구를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야구 기록지였다. 당시 야구 기록지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경기 규칙과 상황 이해만 있으면 경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아사히 신문은 스포츠 중계를 상상하기 힘든 시대에 지면 체육 코너 신설을 통해 야구 콘텐츠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아사히 신문은 야구를 중심으로 콘텐츠 활성화 목표에 걸맞는 ‘소스’가 필요했다. 무라야마는 일본인의 오랜 특성으로 남아있는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고자 했다. 직업야구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이용할 수 있는 것은 학생 야구였다.

아사히 신문은 학생야구를 활용한 대회 구상에 들어갔다. 지역적 특성까지 고려해 탄생한 것은 ‘코시엔’이라 불리는 현재의 전일본고교야구선수권대회다.

이 대회는 과거 지방 영주제에 기틀을 둔 한 지역 한 팀 출전을 원칙으로, 참가팀을 선발한 뒤 본선 대회를 열었다. 대회는 아사히 신문의 본사가 위치한 오사카였다. 아사히 신문은 야구를 알거나 체육에 관심있는 기록원들을 채용해 코시엔의 모든 경기를 기록하고 기사화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15년 제 1회 대회가 열리고 대중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자신이 속한 지역의 학교가 승리하면 열광하고 패배하면 슬픔에 잠기는 분위기가 생겼다. 중계가 없지만 아사히 신문이 배포하는 신문 지면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이때부터 일본 야구의 인기의 한 축을 담당할 지역 거점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특정학교 출신이 아니어도 우리 지역의 대표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단순 고교야구가 아닌 지역 각축전으로 발전했다. 당시 스포츠 어느 종목도 전국 대회의 구색을 갖춘 대회가 없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까지도 ‘코시엔’의 본선 대회는 학교명 앞에 특정 지역 대표라는 이름을 부여해 선수, 지역민들의 자부심을 유발하고 있다. 이렇듯 ‘코시엔’의 성공에 힘입어 야구의 인기가 올라가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또 다른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었다. 





- 요미우리와 MLB

아사히 신문의 성공에 큰 자극을 받은 요미우리 신문 역시 야구를 활용한 콘텐츠 강화를 목표로 정했다. 이미 학생야구는 아사히 신문이 주최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찾아야만 했다. 요미우리의 사장 쇼리키 마스타로는 고교야구를 거친 대학생을 중심으로 콘텐츠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요미우리는 군국주의 물결이 일던 1931년, 일본 6개 대학 선발팀(와세다, 메이지, 게이오, 츄오 등)과 메이저리그 선발팀의 경기를 추진했다. 아사히 신문이 지역주의를 활용했다면 요미우리는 ‘일본 대표’라는 이름을 활용했다. 군국주의와 중일 전쟁 발발을 기점으로 ‘일본 대표’ 이미지는 역시 성공을 거뒀다.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 메이저리그 선발팀과 맞서는 일본 대표는 애국심은 물론, 요미우리 신문의 한 단계 발전을 이뤘다. 아사히 신문의 ‘코시엔’과 별개로 인기를 얻은 요미우리 신문은 직업 야구단의 필요성을 느껴 '도쿄교진군(東京巨人軍 )'이라는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탄생하게 됐다.

팀명에 '교진(巨人)'이라는 이름을 삽입한 것도 미국 메이저리그에 맞서는 일본 거인들이라는 별칭에 따라 정해졌다. '교진'은 현재까지도 요미우리를 칭하는 애칭으로 발전했다. 고교 야구와 메이저리그 선발팀 경기가 흥행하면서 폭발적인 선수 수급으로 이어졌다. 이에 힘입어 마이니치 신문, 주니치 신문 등 여러 신문사들이 야구단을 창단했다. 요미우리의 움직임은 프로야구를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인기와 발전을 거듭하던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으로 야구가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하지만 요미우리는 야구 선수들의 참전과 전사를 각색해 패전 뒤 프로야구 활성화 콘텐츠로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탄생한 스타가 사와무라 에이지다. 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상대로 완투,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사와무라를 영웅으로 치켜세웠고 이는 한 시즌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상 제정(1950년)으로 이어졌다.

‘전쟁 후 야구로 시련을 이겨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다수의 프로야구 구단이 생겨났고 오늘날과 같은 양대 리그 체제로 이어졌다. 요미우리가 만들어낸 일본 대표가 메이저리그와 맞선다는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이용돼 미-일 슈퍼게임, 미-일 프로야구 교류전 등으로 발전하게 됐다.



서영원 기자 schneider1904@hanmail.net

ⓒ 엑스포츠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주요 뉴스

실시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

주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