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간 달려온 엑스포츠뉴스는 세상과 함께 성장하며 쉼 없이 변화해왔습니다. 창간 연도인 2007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모바일과 AI의 확산, 새로운 콘텐츠 환경, 그리고 독자들의 달라진 일상까지. 변화의 길 위에서 질문을 던져봅니다. "상상이나 해봤어?" [편집자주]
(엑스포츠뉴스 이예진 기자) "아빠 안잔다."
2007년, TV를 시청하려면 치열한 눈치게임을 해야 했다. 리모컨을 누가 잡을지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2025년, 그 리모컨은 이제 '재생 버튼' 하나가 다 해결한다.
본방송을 놓칠까 조마조마할 이유도, 채널을 두고 다툴 필요도 없다. 언제든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면부터 다시 볼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과거엔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 현실이 됐고, 이러한 과거가 흐릿한 기억이 될 정도로 당연한 일이 됐다.
◆ 시청률에서 화제성으로, 편성에서 '클립 설계'로… OTT·유튜브 시대의 승부수
18년 전, 본방사수를 위해 손에 쥐던 건 리모컨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지 않으면 드라마와 예능의 흐름을 놓쳤고, 가족 간 ‘리모컨 쟁탈전’도 일상이었다. 2025년의 풍경은 다르다. 본방송조차 OTT에서 라이브로 볼 수 있고, 놓친 회차는 ‘이어보기’로 곧장 따라잡는다. 시청의 주체는 편성표가 아니라 사용자의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 됐다.
넷플릭스·디즈니 플러스·쿠팡플레이·Apple TV+·티빙·웨이브·U+tv·지니TV까지. 플랫폼은 자체 제작과 작품 계약으로 시청 시간을 선점하려 치열한 각축을 벌인다. 유튜브는 숏폼·클립 소비가 일상화되며 사실상 '포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유행과 밈, 화제작을 따라 OTT와 유튜브를 '몰아보기'로 소비한다. 리모컨 대신 재생 버튼 하나면 충분한 시대다.
이처럼 ‘몰아보기’ 문화가 일상화되면서, 과거 인기 드라마들 역시 OTT를 통해 다시 조명받고 있다. ‘뿅뿅 지구오락실’에서 멤버들(이은지, 미미, 이영지, 안유진)이 소지섭, 임수정 주연의 ‘미안하다 사랑한다’ 몰아보기를 이어가는 장면이 짤로 퍼지며 역주행 열풍을 일으킨 것이 대표적이다.
TV 전성시대 당시, 현빈, 김선아 주연 ‘내 이름은 김삼순’은 최고 시청률 50.2%를 기록, 인기리에 방영됐다. 지난해 웨이브가 ‘뉴클래식 프로젝트’로 요즘 감성에 맞게 편집해 공개하자, 공개 당일 신규 유료 가입자를 가장 많이 끌어온 콘텐츠 1위에 오르며 뜨거운 인기를 입증했다. 과거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지하철 TV 앞에 사람들이 몰려 시청하던 장면은, 당시 TV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 "화제성은 필수, 자극은 경계"… 업계가 말하는 새 기준, 그리고 과제
익명을 요청한 업계 관계자는 "화제성은 제작사·방송사 모두가 고려해야 할 필수 요소가 됐다"며 "콘텐츠가 워낙 많다 보니 화제가 되지 않으면 눈에 띄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다만 그는 "화제성만 좇으면 자극적인 소재가 양산될 수 있다"며 "작품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화제성을 확보하는 균형이 업계의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화제성' 자체가 또 하나의 힘이 되고 있다. 방송에서 시청률이 조금 낮아도, 특정 장면이나 대사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밈으로 소비되면서 뒤늦게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짧은 클립이나 숏폼 영상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원작의 인기를 되살리는 '역주행' 현상도 자주 나타난다.
드라마 입소문은 곧 시청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선재업고 튀어' 같은 경우도 이 같은 경우다. 업계 관계자들은 "요즘은 본방송보다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2차, 3차 소비가 화제를 키우고, 다시 본편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유튜브 숏츠나 SNS에서 밈으로 퍼지며 뒤늦게 인기를 얻기도 하고, 예능도 본방송보다는 클립이나 하이라이트 영상이 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방송 뿐만이 아니라 가요도 마찬가지. 이렇게 생긴 관심은 다시 시청률과 플랫폼 트래픽, 순위로 이어진다. 결국 화제성은 단순한 홍보를 넘어서, 콘텐츠의 수명을 늘리고 예상치 못한 흥행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 방송 시간보다 중요한 건 '한 컷의 힘'
예전처럼 방송 시간대가 성패를 가르던 시대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다시보기·클립 소비 중심으로 변화한 환경에서 편성 전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업계 관계자는 "편성 시간대에 얽매이지 않으니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생겼다”며 “다만 클립 단위 소비가 심화되면서 각 회차마다 임팩트 있는 장면을 배치하는 구성력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과거 방송사들이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처럼 요일별 배치를 강조하며 운영하던 편성 라인업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편성표가 아닌 시청자의 ‘재생 버튼’이 드라마 소비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같은 같은 공식이 옅어지는 대신, 회차별 하이라이트·밈 포인트·공유하기 좋은 컷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가 시청 곡선을 좌우한다.
실제로 현장의 PD들 역시 이런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스타 PD 나영석 또한 "요즘 가장 큰 고민은 TV를 잘 안 본다는 것"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고, 김태호 PD는 "우리는 TV가 없다. 가끔 큰 화면 보고 싶으면 장모님 댁으로 간다"면서 "(우리 콘텐츠를) 긴 시간 본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생각 예전보다 더 든다"고 전하기도 했다.
◆ 여전히 유효한 ‘집단 관람’의 힘
그러나 OTT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방송사가 지켜야 할 정체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청률이 단순한 수치를 넘어 사회적 현상을 보여주는 지표로 작동하는 만큼, ‘국민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힘은 방송만이 가진 고유한 가치라는 분석이다.
OTT가 개인 취향 기반 큐레이션에 강점이 있다면, 방송은 여전히 ‘국민 콘텐츠’를 탄생시킬 수 있는 파워를 갖는다. 업계 관계자는 "드라마를 매주 같은 시간에 기다리며 함께 몰입하는 ‘집단 관람’의 재미는 OTT의 몰아보기와 다른 매력”이라며 “시청률은 지금도 유효한 지표"라고 말했다.
그는 "시청률은 동시간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같은 선택을 했는지 보여주는 객관적 수치"라며 "드라마·예능에서 높은 시청률이 나오면 그것 자체가 사회적 현상이 되고, 다시 화제성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고 덧붙였다. 방송의 정체성은 바로 이 ‘공통의 화제’를 생산하는 능력에 있다는 얘기다.
◆ 웹예능으로 보는 플랫폼 경쟁의 돌파구, 즉각 반응의 시대
OTT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방송만의 정체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동시에 새로운 실험의 무대는 웹예능이 차지했다. 짧은 분량으로 가볍게 시도할 수 있고, 시청자 반응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플랫폼 포화 속, 웹예능은 ‘짧고 실험적인 포맷’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 웹예능 '감별사' 제작진은 “OTT가 긴 호흡의 완성도를 보여준다면, '감별사; 같은 웹예능은 짧고 실험적인 포맷으로 즉각적인 팬덤 반응을 얻는 게 강점"이라며 "단순한 시청을 넘어 기부와 애장품을 통해 시청자와 직접 교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팬들이 더 깊게 연결되는 차별화가 있다"고 말했다.
밈·숏폼 편집을 의도적으로 설계하느냐는 질문엔 "밈을 억지로 만들기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호스트와 게스트의 진심을 끌어내는 데 집중한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동시에 재미있는 상황이 터질 수 있도록 기획하는 것이 핵심 전략"이라고 답했다.
댓글·실시간 반응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시청자 반응을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하지만, 본래 기획의 방향성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활용한다. 밸런스를 조절하며 시청자와 함께 성장하는 프로그램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 리모컨에서 재생 버튼까지, 공존의 시대…"결국 함께 가야 할 길"
오늘의 리모컨 자리는 곧 ‘선택의 순간’이다. 어떤 플랫폼이, 어떤 화면에서, 어떤 길이의 콘텐츠로 사용자의 10초를 먼저 붙드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긴 호흡의 완성도로 장기 팬덤을 만드는 OTT, 빠른 실험으로 즉각 반응을 이끄는 웹예능, 여전히 ‘국민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방송. 각자의 무기가 다르다.
제작사 입장에선 방송의 대중성과 OTT의 다양성을 모두 활용해 생태계를 확장하는 전략이 절실하다. 회차별 ‘결정적 한 컷’의 밀도를 높이고, 밈·클립으로 파생 소비를 촉발하며, 본편의 감정선과 메시지를 잃지 않는 균형. 그 삼박자가 맞아떨어질 때, 화제성과 작품성이 함께 선다.
올해 초 방영된 드라마 '원경'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OTT 플랫폼 티빙에서는 19금 버전을, TV에서는 15금 버전을 공개하며 투트랙 전략을 펼쳤다. 하나의 작품이 플랫폼 특성에 맞춰 다르게 소비되며, 방송과 OTT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셈이다.
2007년과는 전혀 다른 2025년. TV 앞에 본방 시간을 기다릴 이유는 줄었지만, 모두가 같은 장면에 웃고 울며 말이 통하는 '공통의 경험'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좋은 작품은 TV, OTT를 구분짓지 않고 '신드롬' 인기가 이어진다. 기술이 바뀌어도 이야기의 힘,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힘은 유효하다. 리모컨의 시대를 지나 재생 버튼의 시대로, 변한 것은 소비형태일 뿐 이야기를 향한 우리의 갈증은 여전하다. 플랫폼은 바뀌어도, 이야기가 사람을 모으는 힘만은 변하지 않는다.
사진=각 채널, 연합뉴스, tvN
이예진 기자 leeyj0124@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