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5-12-0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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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황선홍!

기사입력 2006.05.13 07:43 / 기사수정 2006.05.13 07:43

손병하 기자
한국, 월드컵 도전사-1994년 미국 월드컵

미국 월드컵 본선 조추첨이 끝난 뒤, 한국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지난 대회에서 0-3의 완패를 당했던 스페인과 브라질을 제압했던 볼리비아, 여기에 우승 후보로 평가받던 독일까지 한 조에 편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외적으로는 1승 1무 1패를 목표로 본선 2라운드 진출을 자신했지만, 사실 한국의 초점은 최약체로 평가받던 볼리비아전을 승리로 이끌어 역사적인 '본선 첫 승'을 이룩한다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그만큼 스페인과 독일은 한국에게는 힘겨운 상대였었다.

또, 이전까지 대표팀을 짊어지던 최순호 변병주 박경훈 같은 선수들이 은퇴해 대표팀의 전력이 많이 약화된 것도 미국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을 떨어뜨렸다. 비록 황선홍과 홍명보가 눈부신 성장을 해주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한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서정원 고정운 노정윤 조진호 같은 신예들이 대표팀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지만,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즐비했던 1986년과 1990년 월드컵 멤버들에 비한다면 중량감이 떨어지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예들이 주축이 된 한국은 강했고 스페인과 독일을 상대로 훌륭한 경기를 펼쳐보였었다. 특히 독일과의 최종전은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전차 군단을 몰아붙였으며 일부 언론들은 '스코어는 한국이 패했지만, 경기 내용에선 한국이 이겼다.'라고 보도 했을 만큼 한국 축구는 강했다.

경기 다시 보기

△1994년 6월 17일(이하 한국 시각), 댈러스 코튼보울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스페인


당시, 한국 축구의 문제점으로 끊임없이 지적되어 온 것 중 하나가 바로 대회 첫 경기 징크스였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 대망의 본선 첫 경기인 대 스페인전에서 한국 축구는 '첫 경기 징크스'를 무색케 할 만큼 멋진 경기를 펼쳤고, 전 대회(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0-3으로 완패한 '무적함대' 스페인을 맞아 드라마 같은 승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반 초반은 분명 스페인의 흐름이었다. 이영진 고정운 노정윤 등이 버티는 미드필더라인이 스페인에 밀렸고, 패스의 흐름이 자주 끊겨 전방에 위치한 황선홍에게 이렇다할 기회조차 제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반 25분 스페인 주장 나달이 고정운을 파울로 제지하려다 퇴장당하면서 분위기는 한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나달의 퇴장을 유발시킨 장본인이었던 홍명보는 스페인 진영 아크 왼쪽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에서 강력한 오른발 슈팅을 시도했지만 스페인 골키퍼 카니자레스의 선방에 걸렸고, 후반 35분엔 이영진의 패스를 받은 황선홍이 골키퍼와 1:1의 기회를 잡았지만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하면서 묘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전반 중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던 스페인은 퇴장당한 나달의 주장 완장을 물려받은 이에로의 중거리 슈팅을 계기로 살아났고, 후반 한국의 기를 완전히 꺾는 데 성공했다. 후반 6분, 살리나스의 슬라이딩 슈팅과 10분 고이코체아의 헤딩 슈팅으로 스페인은 2골 차로 앞서나갔다.

스페인전 경기 기록

*날짜-6월 17일
*장소-댈러스 코튼보울 스타디움
*결과-대한민국 2 : 2 스페인
*득점-홍명보(후 40분), 서정원(후 45분)
*실점-데 그리세(후 8분), 데 울프(후 19분)
*출전선수
GK-최인영
DF-박정배, 홍명보, 최영일
MF-김판근, 신홍기, 이영진, 고정운, 노정윤(하석주 74분)
FW-김주성(서정원 59분), 황선홍
좀처럼 만회골이 터지지 않던 한국에 기회가 찾아온 것은 후반 39분. 스페인 문전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에서 이영진이 살짝 밀어준 공을 홍명보가 오른발 슈팅으로 연결했고, 이 공이 스페인 선수의 몸을 맞고 굴절되면서 골문으로 빨려들어갔다. 남은 시간은 5분, 스코어는 1-2. 기세를 올린 한국은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고, 후반 종료 직전 기적은 일어났다.


중앙을 파고들던 홍명보가 포스트에 서있던 황선홍에게 패스했고 다시 황선홍의 논스톱 패스를 이어받은 홍명보가, 오른쪽에서 스페인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노리고 있던 서정원에게 연결했다. 스페인의 오프사이드트랩을 허문 서정원은 골키퍼와 맞서는 1:1 상황에서 침착하게 오른발 인사이드로 스페인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밀어 넣었고, 기적과 같은 2-2무승부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1994년 6월 23일, 보스턴 폭스보로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볼리비아


목표로 했던 승점 1점을 획득한 한국의 다음 상대는 C조 최약체로 평가받던 볼리비아. 한국이 그토록 갈망하던 본선 첫 승은 물론이고 사상 첫 본선 2라운드 진출이 손에 잡힐 듯 보여, 선수단은 물론이고 국민의 기대도 높았다.

경기는 '선수비 후역습'의 카드를 들고나온 볼리비아보다는 공세를 강화한 한국의 흐름으로 흘러갔다. 경기 초반, 한국은 예상과 달리 탄탄한 수비망을 구축하고 웅크린 볼리비아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볼리비아가 독일에 패해 강하게 나올 것이란 예상이 완전히 깨졌던 것이다.

치열한 신경전이 이어지던 전반 15분 한국은 황선홍의 슈팅을 계기로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김주성 노정윤 황선홍 등이 잇따라 볼리비아의 골문을 위협했지만 볼리비아의 트루코 골키퍼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경기 주도권은 한국이 쥐고 있었지만, 볼리비아의 간헐적인 공격도 매서웠다. 전반 16분 발디비에스가 왼쪽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헤딩 슈팅으로 연결하며 최인영 골키퍼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39분엔 산체스가 골과 다름없는 멋진 프리킥을 날렸지만 최인영의 선방으로 막히고 말았다.

이렇다할 활로를 개척하지 못하던 대표팀은 노정윤과 서정원을 빼고 하적주와 최영일일 투입, 홍명보를 미드필더로 올리는 전술적 변화를 통해 승리를 거두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골은 터지지 않았고 기대했던 황선홍의 슈팅은 계속 허공으로만 날아갔다.

볼리비아전 경기 기록

*날짜-6월 23일
*장소-보스턴 폭스보로 스타디움
*결과-대한민국 0 : 0 볼리비아
*출전선수
GK-최인영
DF-김판근, 박정배, 홍명보, 신홍기
MF-이영진, 노정윤(최영일 70분), 김주성, 고정운
FW-황선홍, 서정원(하석주 64분)
후반 37분, 볼리비아의 크리스탈도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면서 또다시 수적 우위를 점한 한국은 마지막 맹공을 퍼부었다. 후반 39분 황선홍이 상대 골키퍼와 1:1의 기회를 잡았지만 골로 연결하지 못했고, 종료 직전엔 황선홍과 하석주가 연이어 슈팅을 날렸지만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월드컵 진출 40년 만에 본선 첫 승의 감격을 기대했던 국민들은 허탈하게 돌아서야 했고, 우승후보로 평가받던 독일과의 최종전만 남겨놓은 한국의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1994년 6월 27일, 댈러스 코튼보울 스타디움
대한민국 vs 독일


'골게터' 클린스만과 '철인' 마테우스가 주축이 된 독일은 한국에게 벅찬 상대였다. 김호 감독은 "주전 대부분이 노장들로 구성돼, 후반 중반 이후 승부를 걸어볼 것"이라고 출사표를 던졌지만, 전반의 대량 실점이 결국 한국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경기 시작, '전차 군단' 독일은 역시 강했다. 전반 11분, 해슬러의 크로스를 받은 클린스만이 180도를 회전하면서 터닝 슈팅으로 연결해 첫 골을 뽑은 독일은, 전반 20분엔 리들레가, 37분엔 다시 클린스만이 추가골을 성공시키며 3-0으로 점수 차를 벌려 놓았다.

전반 독일의 공세를 막는데 급급했던 한국은 후반 들어 실책성 골을 헌납한 골키퍼 최인영을 빼고 신예 이운재를 기용했고, 비장의 카드였던 서정원을 투입하면서 반격을 노렸다. 후반 7분, 그토록 터지지 않았던 황선홍의 골이 터지면서 한국은 경기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무서운 기세로 독일을 공략했다.

박정배의 크로스를 받은 황선홍은 독일 골키퍼였던 일그너가 나온 것을 보고 침착하게 비어있는 골문 안으로 밀어넣었고, 그토록 터지지 않았던 골을 원망이라도 하듯 주먹을 불끈 쥐며 그라운드를 향해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황선홍의 골로 사기를 되찾은 한국은 후반 18분 홍명보의 그림과 같은 중거리 슈팅이 독일의 오른쪽 골망을 흔들면서 추격의 고삐를 당겼다. 달라스의 살인적인 더위에 이미 지쳐버린 독일은 한국의 공격을 막는데 급급했고, 후반 중반부터는 오직 한국의 공격만이 있었다.

독일전 경기 기록

*날짜-6월 27일
*장소-댈러스 코튼보울 스타디움
*결과-대한민국 2 : 3 독일
*득점-황선홍(후 7분), 홍명보(후 18분)
*실점-클린스만 2골(전 12분, 전 37분), 리들레(전 20분)
*출전선수
GK-최인영(GK, 이운재 H)
DF-김판근, 홍명보, 박정배, 신홍기
MF-최영일,이영진(정종선 39분), 김주성, 고정운
FW-황선홍, 조진호(서정원 H.T)
하지만, 끝내 독일의 마지막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후반 31분엔 고정운이 강력한 슈팅을 날렸지만 골키퍼의 선방에 걸리고 말았고, 황선홍과 신홍기의 슈팅도 무위로 돌아갔다. 종료 직전엔 수비수 최영일이 회심의 슈팅을 기록했지만, 골키퍼의 손을 살짝 맞고 나가 아쉬움을 더했다.

결국 2-3 패배. 독일을 꺾지 못한 한국은 2차전 볼리비아와 무승부의 아쉬움을 곱씹으며 돌아서야 했고, 가장 가까웠던 첫 승과 16강의 꿈도 그렇게 접어야 했다.


강호 스페인과 기적과 같은 무승부를 기록하고, 독일과의 경기에서도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줘 한국 축구의 미래를 보긴 했지만, 본선 첫 승과 16강 진출의 염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은 실패한 결과보다는 성공적이었던 과정이 더 의미 있었던 대회로 축구팬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손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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