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장원재 칼럼니스트] 2013년 한국 시리즈가 끝났다. 원년부터 두산 팬이었던 소생에게는 아쉽고도 서러운 결말이다. 3승1패로 앞서다 3연패하며 분패. 페넌트레이스를 4위로 마치고 정규시즌 이후에도 16게임을 더 했으니 체력의 무리가 오죽 심했으랴.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이길 것이라 생각했으니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나보다.
시리즈 시작 전, 삼성 대 두산의 대진표를 보며 82년 원년의 추억에 잠겼다. 1982년 9월 29일 대구구장. OB 대 삼성의 후기리그 마지막 대결. 당시 총 경기 수는 팀 당 80경기. 총 6팀이 전후기 리그 40경기씩을 치르고, 각 리그 우승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른다는 것이 당시의 규칙이었다.
이론 상 전기리그 우승팀이 후기리그에서 꼴찌를 해도 한국시리즈에 나설 수 있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서도 전기우승팀이 ‘외인구단’과 한국시리즈에서 맞서기 위해 후기리그를 포기하고 외인구단이 했던 지옥훈련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설정이 있다.) 전기리그의 우승자는 OB 베어스. 양 팀 공히 후기리그 39번째였던 이 경기 전까지 OB는 2위 삼성에 후기리그 성적 반게임을 앞서가고 있었다.
OB는 24승 투수 박철순에 상당부분 의지하는 팀이었고, 삼성은 이선희 황규봉 권영호 등 15승 투수 3명을 자랑했다. 단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건 OB였다. 전기리그 우승 후 ‘후기리그는 쉬엄쉬엄 체력을 비축하며 한국시리즈에 대비하겠다’던 김영덕 감독은 후기리그 중반 전략을 수정했다. 전기리그에서만 18승 2패 3세이브를 올린 박철순을 아끼고도 백업들의 선전으로 선두를 내달리자 마음이 바뀌었다. 보다 확실한 길로 가겠다. 아예 후기리그도 석권하고 통합우승을 해버리겠다는 대권도전 선언. (실제로 삼성이 85년 시즌 전후기 리그를 모두 석권하며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 시리즈가 열리지 못한 건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시 삼성 감독이 김영덕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역시 딱 한 번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못했다. 1994년 시즌이다. 이유는 시즌 중반인 8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선수들의 파업.) OB가 이기면 그대로 통합우승. 우승하면 좋겠지만, 한국시리즈가 없다면 하이라이트 없이 시즌이 끝나는 것 아냐? 베어스 팬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소생의 눈에 심판의 미묘한 판정이 거듭된 듯 보인 건 오해였을까 착각이었을까.
22시 30분까지의 결과는 무승부. 규정대로라면 그 시각 이후에는 새 이닝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현장에 나와있던 KBO관계자들이 기상천외한 결정을 내렸다. ‘야구선진국 메이저리그 룰에 따라 승부가 날 때 까지 무제한 연장전을 한다.’ 비겨도, OB가 시즌 마지막 경기 MBC 청룡 전을 이기면 역시 전후기 통합 우승인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이다.
공교롭게도, 82년엔 무승부 경기가 단 한 경기도 나오지 않았다. 해태 대 MBC의 경기가 동대문운동장 조명탑이 나가는 바람에 4회까지 이어지다 노게임이 선언된 적은 있었지만. (변압기 고장으로 조명이 꺼졌고, 인근 장충체육관 변압기를 빌려다 경기를 속행했는데 다시 전기가 나갔다. 김봉연 선수가 팬서비스를 한다고, 에나멜을 바른 반짝거리는 헬멧을 쓰고 나왔던 추억 한 자락.) 이것이 KBO가 억지인 줄 알면서도 무제한 승부를 봐야한다고 끝까지 우길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전례가 없지 않느냐, 이것이 규칙이라며 밀어붙이는 데는 장사가 없었다. 하기야 야구는 이기려고 하는 것이지 비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OB는 12회 연장 승부 끝에 이 경기를 내줬다. 후기리그 6승2패 4세이브를 거둔 박철순이 손상대의 기습번트를 수비하다 허리를 삐끗한 것도 엄청난 손실이었다.
전기리그 우승팀 OB 베어스의 홈구장 대전에서 열린 역대 한국시리즈 제1호 경기. 외야에는 관중석 대신 포플러나무가 심어진 둔덕이 있던 시절이다. 양 팀의 선발투수는 강철원과 권영호. 한국시리즈 등판 1호 투수 강철원은 그 해 시즌 성적이 5승 무패였는데 모두 전설의 팀 삼미 수퍼스타즈를 상대로 거둔 전과(戰果)였다.
원년 OB의 대 삼미 전적은 16전 전승. (83년 시즌 양 팀의 첫 경기에서 9회까지 4-4로 이어지다 연장전에서 삼미가 연속득점에 성공하며 감격의 첫 승을 올렸다. 승리투수는 장명부, 패전투수는 장호연이다.) 깜짝선발 강철원은 정말 잘 던졌다. 함학수에게 허용한 2점 홈런과 9회초 배대웅에게 맞은 동점 2루타 등 9회까지 단 2안타로 호투. OB는 10회부터 서울고 출신 선우대영이 마운드로 올라왔고 삼성은 이선희로 맞대응했다. 안타 수는 OB가 12-3으로 우세했지만 경기는 15회 연장 끝에 3-3 무승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무승부 경기다.
5이닝을 던진 이선희는 2차전에서도 선발 등판, 5.1이닝을 또 던진다. 양 팀 홈에서 한 경기씩을 치르고, 나머지 경기는 서울에서 개최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이선희는 한 해의 한국시리즈에서 세 개 도시의 마운드에 올랐던 첫 번째 투수로도 이름을 남겼다.
강철원의 투구폼은 요즈음 정대현과 비슷했다. 빨라 보이지 않는데, 지저분한 구질로 타이밍을 빼앗는 스타일. 삼성의 진동한이 본격적인 언더스로였고, OB의 박상열과 삼성의 양일환은 사이드 암이었다. MBC에는 역사적인 프로야구 개막전 선발 이길환이 언더였고 요즈음 해설자로 인기를 모으는 이광권은 팔의 각도가 훨씬 더 아래에서 올라오는, 일본 롯데의 와다나베 슌스케같은 타입의 잠수함 투수였다.
해태의 83년 우승주역 재일동포 주동식도 사이드 암에 가까운 언더스로였다. 81년 전국대회 우승의 주역 광주상고의 언더스로 윤여국(당시의 유격수가 이순철)은 성균관대 진학 이후 왜 성적을 내지 못한 걸까? 김병현과 비슷한 투구폼으로 강속구를 뿌리던, 손목 힘이 남달리 강했던 경북고의 언더스로 에이스 문병권도 역시 ‘사라진 투수’다. 경북고와 결승전을 앞둔 광주 진흥고 선수들은 경기 전 날 동향의 선배 경희대의 언더스로 박노삼에게 ‘적응훈련’을 부탁했는데, 진흥고 선수들이 경기 전 타격연습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을 눈여겨 본 경북고가 유격수 홍순호를 선발투수로 변칙기용하는 바람에 진흥고가 당황해서 서두르다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전했다는 일화도 있다.
78년 대학야구 춘계연맹전에서 당대 최고 한양대와 맞서 완투했지만 9회말 장효조에게 솔로홈런을 얻어맞고 0-1로 진 인천체전의 김상선과 역시 78년 대통령배 신일고의 막강타선에 일기당천(一騎當千)으로 맞섰으나 최홍석의 좌중간 홈런 한 방에 역시 0-1로 완투패한 뒤 그라운드에서 눈물을 뿌렸던 대광고의 박건도 각각 언더스로와 사이드암이었다.
논어에 나온다.
冉求曰 非不說子之道언마는 力不足也로이다
염구왈 비불열자지도(언마는)역부족야(입니다)
子曰 力不足者는 中道而廢하는데 今女는 畫이로구나
자왈 역부족자(는)중도이폐(하는데)금여(는)획(이로구나) 6/12
해석)
제자 염구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부족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서 포기하는데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OB가 삼성을 4승1무1패로 따돌리며 원년 챔피언의 왕관을 쓴다. 어쨌거나, 1982년 원년에 한국시리즈가 열렸던 것이 오늘날 한국 플로야구 중흥을 위해서는 더 바람직한 결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2013년 시리즈가 끝나고 류중일 감독은 “김진욱 감독 어디 게시냐?”고 적장을 배려했고, 김진욱 감독은 “우리 팀에 패자는 없다.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핑계를 대지 않고, 남 탓 제도 탓 선수 탓을 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하게 상대를 배려한 양 팀의 수장이 소생은 자랑스럽다.
이 정도면 이제 우리 야구문화도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것 아닐까. ‘스스로 한계를 긋는’ 사람이 없고 다들 ‘내년에 더욱 나아진 모습으로 당당하게 승부하겠다’는 건강한 다짐만 있을 뿐이니. 그러고 보니 베어스의 초대감독이자 원년 우승 사령탑 김영덕 감독도 사이드암 투수였다.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6승6패를 기록하고 허리부상으로 퇴단한 뒤 한국에 건너와 실업야구 선수로 몇 년 간 활약. 그가 기록한 한 시즌 방어율 0.32는 실업야구 시절 불멸의 금자탑이었다. 잊을 뻔 했다. 두산 베어스의 현 사령탑 김진욱 감독도 사이드 암 투수 출신이다.
장원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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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13 한국시리즈 ⓒ 엑스포츠뉴스DB]
김덕중 기자 djkim@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