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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시네리뷰'] '경성학교', 누가 소녀들의 뺨을 때리는가

기사입력 2015.06.27 01:27 / 기사수정 2015.07.06 03:45

이영기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은 관객을 1938년의 한 기숙학교로 끌고 간다. 이곳은 표면상으론 몸이 안 좋은 부잣집 따님들의 요양과 교육을 위한 공간이다. 여기서 전학생 주란(박보영)은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만 급장인 연덕(박소담)의 도움으로 조금씩 학교생활에 적응해나간다. 그렇지만 제목처럼 소녀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상냥하다고만 생각했던 교장(엄지원)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급선회한다.

‘경성학교’의 감독인 이해영은 이질적인 것들을 바짝 붙여놓은 다음, 그 화학작용에서 발생하는 코미디와 비애감을 살려내는 데 장기를 보여 왔다. 데뷔작인 ‘천하장사 마돈나’는 제목 그대로 ‘장사의 힘’과 ‘여성스러움’이라는 극과 극의 요소를 한데 버무려서 ‘남자 고등학생’의 몸에 집어넣었다. 두 번째 영화인 ‘페스티벌’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조신한 한복집 여사장님이 SM 마스터가 되어 채찍을 날리고, 과묵한 국어선생은 야밤의 공원에서 여성용 란제리를 입고 내달린다. ‘경성학교’의 주란 역시 이 극단적인 배합 취향의 결과물이다. 관객은 ‘병약한 폐병 소녀’ 주란에게 가장 동떨어진 능력이 결합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근대의 기원
그동안 20세기 초(初)를 시대배경으로 만들어진 한국영화들은 일종의 소재주의에 갇혀 있었다. YMCA야구단(야구), 청연(비행기), 라뒤오 데이즈(라디오) 등의 영화는 전근대적 인물이 근대적 문화 앞에서 느끼는 매혹과 열패감을 다루면서, 동시에 ‘일제시대의 문제’를 후반부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까지 급작스럽게 다루곤 했다. 이 영화들은 기획의도 자체가 ‘근대문물’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일제시대’가 깊이 있게 다뤄질 여지가 본래 적었다.

이후에 몇 편의 영화(모던보이, 원스 어폰 어 타임, 가비)가 목록에 추가되었지만, 소재(근대문물)와 시대배경(일제시대)사이의 어그러짐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관객들은 좀 더 깊이 있고 복잡한 인물을 원했지만, 여전히 인물은 상투적이었고 갈등은 미적지근했다. 왜 이렇게 많은 창작자들이 20세기 초로 돌아가기만 하면 실패를 거듭했던 것일까? ‘경성학교’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되어준다.



학교와 병원은 근대성의 핵심적인 공간이다. 전근대 사회를 살아가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근대의 문화적 충격을 직접적으로 체험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경성학교’는 의도적이든 우연적이든 바로 학교와 병원의 결합체인 ‘기숙학교’를 무대로 삼는다. 지금도 ‘국가개조’를 외치는 무리가 있지만, 근대성은 그 시작에서부터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겠다는 ‘개조의 욕망’으로 들끓었다. 이 ‘개조’의 가장 구체적인 실험실인 학교는 근대성의 폭압적인 성격이 군대만큼이나 두드러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학교. 우리는 그곳에서 뺨을 맞으며 ‘틀에 맞춰지도록’ 지도됐다. ‘경성학교’의 소녀들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약을 강제로 먹어야했던 것처럼, 일본제국주의의 관점에서 대다수의 아시아인들은 병약한 환자이거나 개조의 대상이었다.

‘경성학교’는 이런 근대성의 의미를 파고든다. 덕분에 근대의 문턱에서 발생했던 비극을 ‘민족주의’의 틀로 한정 짓는 서사적 관행을 피해간다. 오히려 근대성의 공포가 저 ‘개조의 욕망’에서 발원했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전형적인 공포영화 장르규칙을 이용하여 대중적으로 풀어낸다.


깨진 유리의 밤
‘경성학교’의 시간적 배경인 1938년은 과연 얼마나 유의미한 설정일까? 막연하게나마 우리는 이즈음에 일본과 독일이 파시즘에 경도되어 갔고, 본격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위한 전시체제로 들어섰음을 알고 있다. 좀 더 폭넓은 정보를 위해 검색을 동원해보자. 38년 4월 일본 제국은 ‘국가 총동원법’을 공표하고, 5월에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한다. 11월에는 독일에서 ‘수정의 밤’ 사건이 일어난다.

‘수정의 밤’ 사건은 한국어로 ‘깨진 유리의 밤’으로도 불리는데, 이 명칭은 사건 당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 ‘수정의 밤’은 나치의 ‘유대인 절멸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815개의 유대인 상점과 171개의 주택, 그리고 유대인의 예배당 시나고그 193개소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이것은 나치 제국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경성학교’는 ‘깨진 유리의 밤’에 일어난 현실적 공포를 되살린다. 소녀들의 예민한 내면과 그들의 육체가 처한 곤경을 예시하는 것처럼, 곳곳에서 유리창은 깨져나가고 소녀들은 그 유리파편들을 밟고 피의 자국들을 남긴다. 그리고 하나둘씩 사라진 경성학교의 소녀들은 나치 시대 유대인의 운명을 따라간다. 소녀들은 사라진 학생들에 대한 교장의 해명만을 믿다가, 점점 그 사라짐이 자신에게도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왔다’는 이 상황의 요체를 정확히 보여준다. “그들(나치)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경성학교’는 잠들어 있는 근대적 기원의 공간이다. 숲속 어딘가에 위치한 이 학교는 비밀의 정원처럼 가시덤불로 뒤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이곳에 이르는 길은 멀고, 여기에 갇힌 소녀들은 숲 너머에는 ‘바다’라는 미래가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녀들은 끝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의 정원 '경성학교'는 여전히 현재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잠들어 있다. ​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공주는 왕자의 키스로 깨어난다. 그런데 동화 속에서 잠든 것은 공주 한 명이 아니라 ‘성에 살던 모든 사람' 이었다. 공주는 왕자의 키스로 깨어난 것이 맞겠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왕자가 일일이 키스를 해 준걸까? 발터 벤야민은 이 '깨어남'에 대해 다른 상상을 제안한다. 사람들이 잠에서 깬 것은, 주방의 요리사가 누군가의 따귀를 때리는 요란한 소리 때문이었다고. 한 사람 이상을 깨우기 위해서는 그처럼 큰 소리가 필요하다고.

관객은 '지도!'라고 괴성을 지르며 소녀들의 뺨을 후려치는 선생들을 본다. 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구타의 기원을 마주해서, 우리는 그동안 '꽤나 쎄게' 맞아왔음을 실감한다. 그래선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은 소녀들이 아니라 화면 밖의 관객이다. 물론 여전히 뺨을 때리는 소리는 미약하고, 영원히 동결된 소녀들처럼 우리의 잠은 깊다. 그래서 이 괴력의 주란이 톡하고 튀어나왔을 때 동시대의 관객들은 실소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소녀의 귀곡성으로 유리창이 박살나고, 금고 같은 수조에 금이 가는 것을 목격해도, 우리에게는 아직 부족하다. 사실 더 큰 소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뺨은 충분히 얼얼하고 세계는 수조에서 넘친 물로 잠겨간다. 다만 귀에 박힌 밀랍이 영원한 잠속으로 재촉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는 지금 꿈속이다.

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nivriti@naver.com)
[사진=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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