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6-16 13:36
스포츠

[비인기종목 이야기-②양궁]

기사입력 2004.09.14 23:06 / 기사수정 2004.09.14 23:06

최동욱 기자
 

 곡선주로보다는 직선주로가 훨씬 긴 기형적인 스타디움.
 1896년 첫 근대 올림픽이 열렸던 파나시나이코 경기장은 바로 우리나라 최대의 메달밭인 양궁의 경기가 펼쳐진 곳이다. 
 이 경기장은 B.C329년부터 고대 경기장으로 설립되었다고 하는 경기장 자체가 유물인 그런 곳이다. 이런 유서깊은 경기장에서 우리나라의 태극기가 무려 세 번이나 올라가는 행복을 맞보았다. 
 국기라 할수 있는 태권도도 이루지 못할 역사를  여섯명의 남여전사가 다시 이루어내고야 말았다


양궁이야기

 양궁은 1900년 파리대회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여 1920년 대회까지 유지되다가 사라지고 다시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단체전은 88올림픽부터 채택되었다. 
 양궁은 세계양궁협회(FITA)에서 주관하며 2년마다 세계선수권대회를 열고 있는데,  남여 개인과 단체의 4개의 세부종목으로 나눠지는 양궁은 130개의 국가연맹을 가지고 있다. 
 양궁은1992년부터 채택된 올림픽 라운드 방식을 채택하면서 보다 박진감 넘치고 화려한 경기로 변모하였는데, 순위결정 라운드를 통한 기록으로 순위를 결정하여 남여 각64명의 진출자순위를 가리고 1위와 64위, 2위와 63위가 1:1로 맞붙는 방식으로 최종 결승까지 치른다.

 이 방식은 기존의 방식보다 이변을 많이 연출하게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주도록 만들어 준다. 
 정신력을 강조하는 양궁에 해병대 훈련, 공포체험, 가상 체험등을 시키는 것은 바로 맞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감과 담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몇해전 훈련을 견디지 못한 남자선수들이 훈련장을 이탈하고 국가대표에 탈락하는 일이 생길정도로 훈련은 강하게 진행된다고 한다. 
 활만 잘 쏜다고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언젠가 선수들이 쓰는 활을 들고 시위를 당겨 본적이 있는데 무척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화와 역사속에서 양궁의 모습은 무척 많이 나온다. 달과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와 태양신 아폴로도 활을 사용하고 헤라클레스 역시 활을 잘 사용하였다.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서도 오딧세이가 엄청나게 단단한 줄을 당겨 커다란 바늘귀를 통과하게 활을 쏘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이처럼 양궁은 영웅들의 기본적인 사용도구였던 것이다. 양궁은 잘 알다시피 활과 화살을 이용하는 운동으로 직경 1.22m의 과녁을 표적으로 두고 경기를 한다. 
 가장 안쪽 노란색은 10점으로 방송에서 해설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골드 또는 황소의 눈이라고도 불린다. 
 요즘은 과녁의 정 가운데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하여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애틀랜다 올림픽때 김경욱선수가 두 번이나 카메라를 박살낸 것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기도 했다. 
 화살이 라인에 닿았을때는 높은 점수로 적용하여 인정해주고 70m의 거리에서 일률적으로 시합을 벌인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거리별로 세분화되어 더 많은 종목이 열리는데 수영처럼 다관왕이 탄생하기도 한다. 
 양궁의 강국을 꼽으라면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를 최고이고 대만, 미국, 호주 등이 두각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는 우려할 일들이 발생했는데 우리나라 대표팀 감독이나 코치, 선수를 역임했던 사람들이 외국지도자로 나가서 일명 ‘부메랑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남자선수들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선수들에게 질때마다 그뒤에는 한국인 지도자가 클로즈업 되는걸 보았다. 무서운 일이다.
 한국팀의 독주로 올림픽 퇴출의 소문까지 났던 양궁은 더 많은 경기방식의 개발과 흥미유발로 팬들을 이끌어 내야하는 부담을 가지게 되었고,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우리나라 선수들은 더많은 땀방울을 흘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대회 때마다 샛별들이 나타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지만 이제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지금처럼 싹쓸이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오래도록 우리나라 양궁이 세계에서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노력과 수고도 중요하지만 이제 올림픽때만 열렬히 응원하는 반짝 응원단이 아닌 지속적인 사랑과 박수를 보내는 서포터즈의 활동도 있어야 할것으로 보인다. 
 또한 협회나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도 당연하고...
 
 어릴적 같은 고향에서 무척이나 유명했던 김진호 선수가 생각이 난다. 
 84올림픽에서 서향순선수에게 비록 지기는 했지만 거의 10여년을 최고의 선수로 지낸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겨우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사인한장 받아 두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드는 오후였다.



최동욱

ⓒ 엑스포츠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주요 뉴스

실시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

주간 인기 기사

연예
스포츠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