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츠뉴스 김현기 기자)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였다.
4년 전 중국으로 귀화한 쇼트트랙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린샤오쥔(한국명 임효준)이 '새 조국'에서 치른 첫 국제종합대회에서 과거의 조국인 한국 선수들과 상대하며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단체전에서 1위로 달리다가 넘어져 동료 선수들을 '노 메달' 신세로 만들었으나 개인전에선 금메달과 은메달을 하나씩 거머쥐었다.
특히 우승 직후엔 눈물을 쏟아내며 동료 선수들과 기쁨을 만끽했다. 시상대에선 중국 국가를 중국어로 크게 입 벌려 부르며 자신의 이름을 외친 중국 팬들에게 화답했다.
내년 2026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을 1년 앞둔 한국 쇼트트랙은 그의 컨디션이 한국에서 2018 평창 올림픽에 참가할 때 만큼 올라온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됐다.
린샤오쥔은 8일(한국시간) 중국 하얼빈 헤이룽장 빙상훈련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2025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이틀 째 마지막 경기 남자 500m 결승에서 박지원(서울시청)과 장성우(화성시청)를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날 결승전은 한중전으로 압축됐다. 이 종목 강자인 데니스 니키샤(카자흐스탄)이 준결승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출발선엔 박지원, 장성우, 김태성 등 한국 선수 3명, 린샤오쥔과 쑨룽 등 중국 선수 2명이 섰다.
레이스가 두 차례나 취소된 끝에 승자가 가려졌다. 첫 레이스에선 가장 안쪽인 스타트 포지션 1번 김태성과 2번 쑨룽이 첫 코너를 돌 때 서로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다가 넘어졌다. 규정에 의해 재경기가 선언됐다.
두 번째 레이스에선 두 차례나 충돌이 일어난 끝에 5명 중 4명이 넘어져 역시 재경기가 확정됐다. 이 과정에서 김태성이 페널티를 받고 결승 레이스를 참가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결국 한국과 중국에서 각각 두 명씩 4명이 111.11m 링크를 4바퀴 반 도는 레이스에서 엎치락뒤치락 명승부가 펼쳐졌다. 스타트가 좋은 쑨룽이 치고 나사면서 린샤오쥔이 그 뒤를 쫓아갔으나 쑨룽이 두 바퀴를 돌고 뒤로 밀렸고 박지원이 선두로 뛰쳐 나왔다.
하지만 결승선 한 바퀴를 남겨놓고 린샤오쥔이 인코스를 절묘하게 파고 들어 박지원을 제쳤다.
린샤오쥔이 결국 41초150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금메달 주인공이 됐다. 박지원(41초398)과 장성우(41초442)가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린샤오쥔은 오른손을 불끈 쥐며 결승선을 통과하고 우승 기쁨을 만끽하더니 중국 대표팀을 지도하는 전재수 코치에게 달려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중국 대표로 활동한지 어느 덧 3년 차가 됐지만 국제종합대회는 이번이 처음이다보니 감회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과 장성우도 엎드려 울고 있는 린샤오쥔에게 다가가 등을 두들기며 축하를 전했다.
린샤오쥔은 이번 대회 쇼트트랙 종목에서 홈링크 중국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 이날도 중국 관중은 린샤오쥔을 향해 쩌렁쩌렁한 '자여우'(加油·힘내라)로 열띤 응원을 펼쳤다. 그는 아시안게임 직전 "중국을 위해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는데 일단 금메달 하나는 목에 걸었다.
특히 8일 한국이 금메달 4개를 쓸어간 가운데 린샤오쥔이 개최국의 자존심을 살린 꼴이 됐다.
린샤오쥔은 2018 평창 올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우승한 금메달리스트다.
그는 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낸 직후 몇몇 유럽 선수들처럼 "다음 올림픽에선 쇼트트랙과 함께 스피드스케이팅에도 함께 도전하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태극마크에 대한 포부가 컸다.
하지만 그의 쇼트트랙 인생은 2019년 동료 선수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면서 송두리째 바뀌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부터 선수 자격정지 1년 징계를 받고 2020년 중국으로 귀화했다. 해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했지만 린샤오쥔은 그 전에 중국으로 건너가 귀화 절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후 2022-2023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을 통해 태극기가 아닌 중국 오성홍기를 달고 복귀한 그는 지난해 3월 네덜란드 로테르담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500m 우승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사실 이날 린샤오쥔은 오전에 큰 실수를 범해 단체전을 망쳤다. 8일 쇼트트랙 종목 첫 메달 레이스 혼성 2,000m 결승에서 1위로 달리다가 결승선까지 두 바퀴를 남기고 곡선 주로에서 홀로 넘어졌기 때문이다. 결승선 한 바퀴 반을 남기고 넘어진 것이라 만회하기도 어려웠다. 그의 뒤를 쫓던 박지원이 가장 먼저 들어오면서 한국 쇼트트랙은 이번 대회 첫 종목에서 금메달 낭보를 전했다.
이어 열린 남자 1500m 결승에서는 박지원에 이어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선두를 달리다가 박지원에 뒤집히면서 2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럼에도 멘털을 다 잡고, 중국으로 귀화한 뒤 자신의 주종목이 된 5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린샤오쥔은 전 코치와 오열한 뒤 붉은색 오성홍기를 들고 경기장을 돌며 관중에게 인사했다. 이어 시상식에선 오성홍기를 바라보며 입으로는 의용군행진곡을 따라 불렀다.
린샤오쥔의 금메달은 한국 쇼트트랙 입장에선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될 수도 있다.
최근 남자 쇼트트랙에선 한국과 중국, 캐나다 등 3국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특히 린샤오쥔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한 번 따봤기 때문에 전성기를 다시 찾으면 한국 선수들의 특징을 아는 그의 스케이팅이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안현수가 2006 토리노 올림픽 3관왕 안현수가 이후 러시아로 귀화,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해 2014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 따내면서 한국 쇼트트랙은 쑥대밭이 된 적이 있다.
한편, 이날 믹스트존에서는 린샤오쥔을 향해 한국과 중국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엑스포츠뉴스 등 현지 취재진에 따르면 린샤오쥔은 "내일 인터뷰하겠다"며 빠르게 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
린샤오쥔은 9일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남자 1000m와 5000m 계주에 출전한다.
사진=연합뉴스
김현기 기자 spitfire@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