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6-17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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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승’ 오매불망 내 사랑

기사입력 2006.02.18 00:02 / 기사수정 2006.02.18 00:02

윤욱재 기자

팬들의 사랑 속에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뤄 온 한국프로야구가 어느덧 25년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프로야구는 수많은 경기들을 통해 팬들을 웃고 울리는 동안 불세출의 스타들이 탄생하였고, 또 그것이 야구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엑스포츠 뉴스에서는 윤욱재 기자를 통해 스타 선수들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박철순부터 손민한까지 '그 해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중심으로 집중 조명합니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프로야구 25년 특별기획 - 나의 몬스터시즌 3] 1983년 장명부


한국 올 때부터 '너구리 본색'

장명부는 한국프로야구 무대에 상륙할 때부터 화제를 몰고 온 선수였다. 하긴 일본프로야구 출신인데다 당시엔 어마어마한 1억3천만원의 연봉을 받게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프로야구 최초의 재일동포 선수 가운데 한명인 장명부. 재일동포 선수가 국내프로야구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약팀들의 전력을 보강하자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KBO가 내민 구원의 손길은 '원년 꼴찌' 삼미와 선수 부족으로 허덕이는 해태로 향했다. 장명부와 이영구는 삼미, 주동식과 김무종은 해태로 배정됐다.

삼미는 장명부에게 특급대우를 약속하며 입단을 요구하지만 오히려 장명부는 일본으로 돌아가 삼성의 훈련장을 드나들며 삼미 관계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결국 삼미는 장명부와 입단계약을 확정지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한편으론 장명부가 얄미운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어차피 계약할 거면 시원시원하게 할 것이지 왜 괜히 남의 집이나 들락날락거리느냐는 것. 삼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장명부의 삼성 캠프 방문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명부는 삼성의 전력이 '우승후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삼성의 스프링캠프를 찾아간 유일한 이유였다. 제 발로 찾아온 장명부는 삼미란 팀에 가기 싫다며 투정을 부리고 배팅볼 투수를 자청해 훈련까지 도와줬다. 삼성으로선 너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스파이 작전'이었을 줄이야.

결과부터 말하자면 장명부는 국내무대에 데뷔한 1983년 시즌 30승 중 8승을 삼성에게서 거뒀다. 패전은 한 차례도 없었다. 완벽했다. 이것이 장명부가 그토록 짝사랑하던 30승과 사랑을 이루는데 한 몫을 거뒀다.

30승! 한 우물만 판다

그렇다면 장명부는 왜 그토록 30승에 집착했을까.

시즌 전의 약속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형 구단 사장과 마주 앉은 장명부는 허 사장으로부터 "30승을 거두면 1억 원의 보너스를 얹어준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부터 30승 하나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정말 던지고 또 던졌다. 완투를 밥 먹듯이 했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중간계투 등판도 서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30승에 대한 초조함은 이틀에 한 번씩 등판하는 초강수로 이어졌다. 결국 9월 26일 해태전에서 9이닝 완봉으로 30승의 대미를 장식했다. 아무리 보너스에 대한 욕심이라 해도 이건 인간승리였다.

사실 장명부는 그리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대신 심리전의 대가였다. 상대의 예상을 뒤집는 볼 배합은 장명부의 트레이드마크. 가끔 빈볼성 투구를 하기로 유명했는데 이럴 때마다 장명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은근히 타자를 약 올렸다. 능글맞은 너구리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타자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의 선수

장명부의 1983년 시즌은 앞으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전설로 남을 것이다.

본인의 30승에 대한 강한 열망과 정상적인 투수로테이션 개념이 자리 잡지 못한 당시의 상황이 이런 대기록을 만들어냈다. 이제 현대식 야구가 자리 잡은 이상 장명부와 같은 기록은 두 번 다시 못 볼 것이다.

장명부 열풍은 1983년 시즌의 판도를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원년 꼴찌 삼미는 장명부와 더불어 재일동포 내야수 이영구, 국가대표 투수 임호균 등 알짜배기 전력보강에 힘입어 돌풍을 일으켰다. '인천 야구의 대부' 신임 김진영 감독의 역할도 컸다. 하지만 아쉽게도 해태에 밀려 한국시리즈 진출엔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장명부는 역사적인 한 해를 보내며 한국프로야구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시즌 전 약속받았던 보너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혹사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이와 같은 활약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올드팬들에게 진한 향기를 남기고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1983년 시즌의 활약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장명부 (1983년) → 30승 16패 6세이브 방어율 2.34 

* 본 편에 소개된 일화에 대해선 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사실임을 밝힙니다. 공식 책자로는 <종횡무진 인천야구> 등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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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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