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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나이, 4할의 벽을 넘다

기사입력 2006.02.16 22:06 / 기사수정 2006.02.16 22:06

윤욱재 기자
팬들의 사랑 속에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뤄 온 한국프로야구가 어느덧 25년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프로야구는 수많은 경기들을 통해 팬들을 웃고 울리는 동안 불세출의 스타들이 탄생하였고, 또 그것이 야구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엑스포츠 뉴스에서는 윤욱재 기자를 통해 스타 선수들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박철순부터 손민한까지 '그 해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중심으로 집중 조명합니다. 앞으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프로야구 25년 특별기획 - 나의 몬스터시즌 2] 1982년 백인천

일본프로야구 출신, 감독 겸 선수 등 '화제만발'

백인천이 고국으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그 자체만으로도 빅뉴스였다. 일본프로야구 강타자 출신인데다 서울을 연고로 하는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입단했으니 화젯거리가 되는 건 당연했다.

백인천은 1963년 일본프로야구 도에이에 입단해 75년엔 다이헤이요에서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차지할 만큼 가공할 타력을 선보이며 일본프로야구에 큰 족적을 남긴 역대 용병 선수 중 하나였다.

백인천은 81년 긴데쓰에서 플레잉코치를 하던 중 이용일 KBO 사무총장이 "한국에서 감독 자리 하나만 맡아 달라"며 부탁하자 곧바로 귀국, 마침 감독 자리가 비어있던 MBC에 입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감독 백인천'만 아니라 '선수 백인천'으로도 MBC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감독 겸 선수.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감독으로서의 지휘 능력과 선수로서의 출중한 기량이 모두 받쳐줘야 따낼 수 있는 직함이 그것이다.

일본프로야구에선 선수 생명이 막바지에 접어들 시기였지만 그 때서야 프로야구가 창설되는 한국에선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40세에 정복한 4할의 탑

비록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그였지만 기량은 국내 선수들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

3월 27일 역사적인 프로야구 개막전 MBC : 삼성의 경기에 등장한 백인천은 두 번째 타석에서 첫 안타, 세 번째 타석에서 첫 홈런을 터뜨리며 맹활약했다. 이 경기에서 MBC는 연장 접전 끝에 이종도의 극적인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백인천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데뷔전을 첫 승으로 장식, 화끈한 신고식을 치렀다.

백인천을 상대하는 투수들이 일본프로야구 타격왕 출신인 그에게 좋은 승부를 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출중한 타격 능력을 앞세워 결국 4할 타율이라는 대업을 이뤄냈다.

혹자는 백인천의 4할 타율은 미숙하기 짝이 없는 프로야구 원년이었고 출장 경기 수도 100경기가 안 넘은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백인천은 당시 만 40세의 고령 선수였다. 게다가 규정타석도 채웠고 72경기에 출전(당시 한 팀 당 80경기씩 소화)해 100안타 이상을 기록했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결코 순탄치 못했던 '감독 백인천'

'선수 백인천'은 0.412란 전설의 타율을 남기며 한국프로야구 초대 타격왕을 거머쥐지만 '감독 백인천'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데다 구단과 의견차를 보이며 충돌을 벌여 결국 둘 사이는 돌아갈 수 없을 만큼 틀어지고 말았다.

물론 후기리그에서 삼성과 경쟁을 벌이며 선두권을 형성했지만 8월 말부터 7연패 수렁에 빠지면서 결국 우승권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추락하는 팀 성적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서 그랬을까. 8월 26일 삼성전에서 심판 판정에 불복하며 항의하다 프로야구 최초로 몰수게임이 선언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프로의 생리를 강조하며 카리스마식 팀 운영을 지향한 백 감독과 야구단 경영에 대한 경험이 없어 그러한 백 감독을 이해하지 못한 MBC는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백인천은 MBC와 연봉 협상이란 마지막 전쟁을 뒤로 하고 퇴단을 결정해 서로 갈라서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연봉 협상에서 백인천은 감독으로서의 대우와 선수로서의 대우를 따로 받아야한다고 주장했지만 팀에서는 그저 '돈만 밝히는 선수'로 이해했다. 프로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합당한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개념조차 잡히지 못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햇병아리 시절'이었다.

백인천 (1982) → 19홈런 64타점 타율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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