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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영화진화론’] '차이나타운', 아! 이토록 새로운 엄마라니.

기사입력 2015.05.26 01:05 / 기사수정 2015.05.26 01:24

이영기 기자



[엑스포츠뉴스=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 코인로커에서 발견되어 노숙자들 사이에서 자라난 일영(김고은)은 차이나타운의 냉혹한 보스인 ‘엄마’ 마우희(김혜수)의 새끼로 자라난다. 누구보다도 엄마의 총애를 받던 일영은 채무자의 아들인 석현을 만나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이 흔들림의 대가는 가혹하다. 일영은 자신이 죽거나 엄마의 세계를 송두리째 죽여야 한다.

1. 치킨 게임과 도미노 게임

‘차이나타운’은 많은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그 중에서도 ‘일영과 마우희의 대립각’은 ‘달콤한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보스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수도승 같은 부하, 우연히 ‘바깥 세계’를 보게 되면서 흔들리는 부하의 영혼, 그 흔들림을 용인하지 못하는 보스. 사실 위 세 문장으로 묘사한 설정은 수많은 누아르 영화를 양산한 장르의 거푸집이다. 단적으로 근래의 한국영화에서 예를 들어보면, 소지섭의 '회사원'이나 장동건의 '우는 남자'도 이 거푸집을 통과한 생산물이다.

‘달콤한 인생’은 전형적인 김지운식 치킨 게임의 인물들을 보여준다. 겁먹은 놈이 진다는 수컷의 자존심 대결. 두 대의 차가 마주 보고 돌진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나 ‘놈놈놈’의 인물들은 언제나 그 싸움의 명분보다 훨씬 과하게 대결을 벌인다. 김지운의 인물들은 산란기의 연어처럼 ‘반칙왕’의 프로레슬링 무대로 매번 돌아간다. 바로 그곳에서만 자기가 증명된다고 믿는 것처럼. 그래서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장면인 이병헌의 섀도복싱은 영화 속의 대결이 ‘나르시시즘’에 불과했음을 확인시킨다.

반면 ‘차이나타운’의 세계는 다르다. 이 세계의 인물들은 시스템의 정지버튼이 어디에 있는지를 도통 모른다. 일이 시작되면 재량권이 있다고 생각되는 ‘엄마’조차도 걷잡을 수없는 흐름을 멈추지 못한다. 와르르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인물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간다. 한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물들(일영, 마우희. 우곤, 쏭, 홍주 등등)은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대결구도다. 마지못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인물들은 강제규의 영화들(쉬리, 태극기 휘날리며)말고 그 예가 별로 없다. 강제규의 영화들이 ‘분단이라는 고정된 시스템’을 비극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차이나타운’ 역시 한번 방아쇠를 당기면 총성이 그치지 않는 ‘타운의 시스템’이 인물들을 몰아붙인다. 그래선지 차이나타운은 일종의 미로처럼 보인다. 탈출구를 찾는 것이 요원한 세계. 그런 점에서 석현은 일영의 아리아드네(ariadne)라고 부를만하다.

2. 대부와 엄마

대부(godfather)를 ‘엄마’로 바꿔 부를 생각을 지금껏 아무도 못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차이나타운의 ‘엄마’라는 호칭은 묘한 효과들을 생산해낸다. 특히 경찰제복과 양복쟁이 중년 아저씨가 김혜수에게 ‘엄마’라고 부를 때의 낯설음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만하다. 이 바꿔 부르기는 ‘차이나타운’에 참신함을 부여한다. 마우희라는 ‘엄마’가 일반명사 엄마에서 기대되는 것들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스트레이트하게 잔인한 엄마를 본 적이 있는가? 엄마라는 명칭은 마우희를 통과하면서 언어유희가 된다. 쓸모없으면 가차 없이 목을 긋는 엄마라니.

‘대부 1’은 부계권력이 대물림되는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 옛 민담처럼 권력에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막내가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자리에 앉는다. 아들(알 파치노)은 아버지(말론 브란도)의 죽음을 복수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아버지 시대의 ‘부하-시스템’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이 시대에 돌이켜봐도 대부의 살부의식(殺父意識)은 남다른 데가 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경쟁자들을 죽이는 우회의 형식으로 아버지의 권력을 획득한다. 아마도 햄릿이 살아남았다면 마이클(알 파치노)의 전범이 됐을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일영은 시체의 산을 오른다. 그 시체들은 일영이 죽이지 않았음에도 일영의 발밑에 쌓인다. 시체들에 떠밀려 점점 위로 올라서는 일영. 일영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애쓰다보니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엄마 시대의 ‘부하-시스템’을 제거하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일영이 대부의 알 파치노와 다른 점은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력을 원하지 않았고 권력에서 도망치려 했을 뿐인데, 기이하게도 무너진 권력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미로를 풀면 미로의 주인이 된다고 할까.



3. 차이나타운

일영은 코인로커에서 발견된다. 꽉 막히고 어두운 직사각형. 보통은 죽음이후에 관에 실리지만 일영은 시작부터 관에 갇혔던 셈이다.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은 마우희와 자식들이 도대체 ‘돈을 벌어서 어디에 썼을까?’라는 점이었다. 차림새며 집 꼬락서니를 보면 빈곤층과 다를 바가 없다. 돈을 벌 줄만 알지 쓸 줄은 모르는 답답한 집안이다. 이러니 일영이 석현이 일하던 파스타 집에서 넋을 잃을 수밖에.

이 우울한 식구들은 단체로 저승사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 패밀리 비즈니스가 고리대금과 장기밀매라는 점에서 그렇고, 이들이 사령(死靈)처럼 반복강박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여서 그렇다. 비명횡사한 귀신은 사고지점을 맴돌며 죽음의 순간을 반복 재생한다. 첫째 우곤은 컴컴한 방에서 벽만 바라보고, 둘째 쏭은 매번 약에 취해 흐느적거린다. 조금 모자란 막내 홍주는 같은 문장을 집요하게 반복한다. 이 톱니바퀴 같은 기계적 반복들이 차이나타운이라는 걸까.

본래 ‘차이나타운’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1974년에 만든 영화의 제목이다. 한국영화 시장의 ‘고전영화 제목 베끼기’라는 고질병은 귀에 익은 제목으로 관객을 끌어보겠다는 의도 때문에 창궐한다. 그래서 대체로는 제목과 영화가 따로 논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차이나타운(2015)’은 원제목의 영화와 비교할만한 지점들을 갖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원형적인 괴물-아버지를 보여준다. 로스엔젤레스의 창조자인 이 아버지는 돈과 섹스, 그리고 도시의 모든 욕망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이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그래서 ‘차이나타운’이라는 명명은 불가해함과 무력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2015)’에도 이런 불가해함과 무력감이 배어 있다.

 ‘엄마’는 본래 예외를 두지 않는 냉혈한이다. 사람들을 밀항시키고 고리대금을 빌려준 뒤 신체포기각서를 근거로 목숨을 강탈하는 견고한 시스템의 지배자. 이 비즈니스에는 타락한 경찰과 지역유지가 달라붙어 있다. 이 한통속에서 누가 법의 지배를 기대하겠는가. 당연하다는 듯이 영화 속에는 경찰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 그럼에도 이 치외법권의 지배자인 ‘엄마’조차 예외를 만들 수 없다. 계속해서 주변의 인물들(치도, 안선생, 제복남 등)이 일영을 예외로 두려는 ‘엄마’에게 경고신호를 보낸다. 현실세계의 권력자들이 언제나 법을 초월해 재량권을 남발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 예외불가의 원칙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이 예외 없음, 서로가 서로를 부추기고 옥죄게 만드는 ‘출구 없는 닫힌 체계’가 차이나타운의 본모습이다.

 (여기서부터는 영화의 결말부분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Horror! Horror!

‘차이나타운’이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결말이다. 마우희의 이 신기한 죽음은 전례가 거의 없다.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자신의 처형자를 기다리는 악당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이 윌러드 대위(마틴 쉰)를 맞이한 예가 그나마 비슷할 뿐이다.

 윌러드는 커츠에게 도달하는 긴 여정 속에서 커츠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이들은 전쟁이란 명분이 무엇이든 지옥을 현재화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은 자들이다. 전쟁은 그토록 허무하고 무의미하지만 이미 그들 자체가 전쟁이고 ‘암흑의 핵심’이다. 내 안의 암흑을 없애기 위해서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출구.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가 일영을 유일하게 안아주는 순간이 일영의 칼에 찔릴 때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칼을 사이에 두고서만, 그러니까 칼날이라는 그 좁디좁은 길 위에서만 진심을 토로하는 엄마.

 지옥의 묵시록의 마지막. 커츠가 윌러드의 칼에 죽어갈 때, 밖의 원주민들은 희생제의에 바쳐진 소를 도륙한다. 두 이미지가 겹쳐지는 그 유명한 장면. 커츠대령은 ‘Horror! Horror!’라고 낮게 읊조리며 죽어간다. 죽음으로 인해 암흑에서 풀려나는 환희인가, 아니면 죽음에서조차도 여전한 암흑에 대한 공포인가. 반면에 마우희는 일영에게 ‘죽을 때까지 죽지마라’는 유언을 남긴다. 생사여탈권을 누구에게도 넘기지 말 것을, 그러니까 새로운 ‘엄마’가 되라고 선언한다. 과연 일영은 어떻게 살아갈까? 우선 일영은 안선생을 제거하는데, 더 이상 장기밀매를 하지 않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영은 갱스터들과 함께 차이나타운에 남는다.

 보로헤스의 단편소설『아스테리온의 집』의 주인공은 미노타우루스다. 미궁을 지키는 괴물. 그런데 보르헤스는 우리가 아는 미궁의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뒤집어 놓는다.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의 끔찍한 외모 때문에 밖에 나서지 못하는 고독한 인간이다. 그는 테세우스가 자신을 구원하러 올 것이라며 기다린다. 자신의 끔찍한 고통과 고독을 어서 끝내주기를 원하면서. 어쩌면 ‘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이렇게 보면 차이나타운은 이상한 구원의 이야기처럼도 느껴진다.

 (※ ‘김동진의 영화진화론’은 한 편의 영화를 그보다 앞선 영화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려는 기획입니다.)

김동진 대중문화평론가(nivriti@naver.com)

[사진=차이나타운· 대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 ⓒCGV아트하우스]



이영기 기자 leyoki@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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