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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야구] 못 다핀 꽃 한송이

기사입력 2007.08.02 20:27 / 기사수정 2007.08.02 20:27

편집부 기자

    

[엑스포츠뉴스=박현철 기자] KIA 타이거즈가 1일 투수 김진우(24)를 임의탈퇴 공시 요청하며,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광주 진흥고 시절 '한국야구를 이끌 재목'으로 평가받던 김진우였음을 생각하면 이번 조치는 더욱 충격적입니다.

자의던지 타의에 의해서든지 재능을 인정받은 선수가 선수생명을 다 하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접는 일은 언제나 안타깝습니다. 김진우 이전 아깝게 선수생활을 마친 선수 두 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강기웅, 그에게 체력만 있었더라면

대구고-영남대-실업팀 한국화장품을 거쳐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하던 강기웅은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2루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불세출의 유격수 김재박이 철저한 노력과 자기관리로 으뜸이 되었다면 강기웅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였습니다.

88' 서울올림픽 멤버였던 강기웅은 한국화장품 시절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공, 수, 주 모두를 갖춘 2루수로 각광받았습니다. 강기웅은 89년 고향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첫 해 타율 .322(2위)를 기록하며 '명불허전'임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신인왕 타이틀은 전천후 활약을 보여준 태평양 돌핀스의 에이스 박정현에게 뺏겼습니다. 그러나 강기웅은 이후에도 만능 활약을 펼치며 유격수 류중일과 환상의 키스톤 콤비로 이름을 날리며 골든글러브 3회 수상의 업적을 이룹니다.

강기웅에게 좋은 체력이 있었다면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더욱 빨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96년 당시 삼성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백인천 감독은 '원정 때는 밥숟가락도 못 드는데 어떻게 마음 놓고 써?'라며 강기웅을 비하했습니다.

게다가 95년 계약금 2억 2천만 원을 받으며 신인 야수 최고액에 입단한 김재걸까지 대두했습니다. 약한 체력으로 백 감독의 훈련량을 소화해내지 못했던 강기웅은 '미운털'이 박혀 96' 시즌 후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됩니다.

그러자 강기웅은 고향팀을 떠나는 데에 크게 반발, '나 야구 안해!!'라며 야구 인생의 단말마를 외치고 프로야구계를 떠났습니다. 강기웅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야구팬들은 태평양-LG를 거쳤던 외야수 박준태와 강기웅을 함께 놓고 '그들의 스태미나가 좋았다면 야구계는 어땠을까?'라며 가정을 하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경일, 요미우리의 인질로 야구 생을 마감하다

이승엽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는 한국인 선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리케이이치'라는 등록 명으로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뛰었던 포수 이경일. 그는 하라 감독에게 타격 재능을 인정받고도 그 재능으로 야구인생을 끝마쳐야 했습니다.

이경일은 고교 시절 현재 요미우리의 좌완 에이스가 된 우츠미 테츠야와 배터리를 이뤘습니다. 우츠미는 프로에서도 이경일과 배터리를 이루길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 11월 드래프트에서 둘은 엇갈리고 맙니다.

우츠미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지명되었고 이경일은 8순위로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우츠미는 3년 후 역 지명으로 요미우리 입단하기 위해 실업 야구로 발길을 돌립니다.

우츠미가 실업팀에 있는 동안 우츠미 입단을 위한 인질이 되어버린 이경일은 2군에서, 그리고 2003년 막판 예상치 못했던 타격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포수 리드에 있어선 투수에게 따라가는 스타일이라 별 호응은 못 얻었지만 백업 1루수 겸 대타 요원으로 '낭중지추' 같은 타격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경일은 당시 한국계 좌완 하야시 마사노리(한국명:임창범)와 함께 요미우리가 2003시즌 찾은 진흙 속 진주로 평가받았습니다. 게다가 2004년 우츠미가 입단하면서 이경일의 앞날은 조금 밝은 듯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허벅지 부상으로 2군에 떨어졌고 이경일의 선수생활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후 요미우리의 이기적 행태가 벌어졌습니다.

요미우리는 우츠미를 얻었고 아베 마사히로, 기요하라 가즈히로, 에토 아키라, 고쿠보 히로키 등 이경일이 들어갈 만한 곳에는 스타가 넘쳐나 이경일의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요미우리에게 이경일은 다른 팀에 주거나 그냥 자유계약으로 풀기엔 아까운 존재였습니다.

이경일은 2003년 막판 좋은 타격 재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요미우리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요미우리는 2004년 11월 24일 이경일을 '임의은퇴선수(일본의 임의탈퇴)'로 묶어 강제은퇴시켰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병풍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주전포수 최기문을 잃는 위기에 처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이경일의 영입을 시도했으나 적(籍)이 요미우리에 묶인 이경일을 롯데가 데려올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이경일은 이듬해 요미우리 불펜 포수로 있다가 야구를 완전히 접었습니다. 2000년 11월 요미우리 지명에 감격해 홀어머니를 끌어안고 눈물짓던 '한국인 인질' 이경일을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임의탈퇴 공시 요청 이후 한국야구위원회의 승인이 떨어지기까지는 하루 정도가 소요됩니다. 만약 8월2일 부로 김진우의 임의탈퇴가 수락된다면 김진우의 탈퇴 해제기간은 2008년 8월1일까지입니다.

만약 김진우가 야구 재개 의사를 밝히고 예전의 광속구를 뿌려 KIA가 2008년 김진우를 복귀시켜도 7월 31일 이후의 등록이 되어 KIA는 2008년 포스트시즌 진출 시 김진우를 쓸 수 없습니다. 물론 김진우의 임의탈퇴, 그것만으로도 안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김진우는 야구 인생의 질곡이 많았던 선수입니다. 부모님을 편히 부양하기 위해 계약금으로 건물을 짓다가 어머니를 여의었고 취중 폭력사건에 휘말려 손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체중관리에 실패해 무릎에 탈이 나기도 했습니다.

KIA팬 중 누군가는 그의 복귀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설령 팬이 모두 사라졌다고 해도 가족들은 그의 복귀를 절실히 바라고 있습니다. 훗날 안타까운 야구인이 아닌 자신의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 김진우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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