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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웃 돌아보기 (5)

기사입력 2005.05.02 23:15 / 기사수정 2005.05.02 23:15

김주우 기자


강혁 영구제명 파문

91년 고교야구는 신일고의 강세가 돋보인 한 해였다. 대통령배 준우승에 이어 (차명주-곽재성의 경남상고에 敗) 봉황기,황금사자기를 연이어 제패한 신일고는 우승 횟수뿐 아니라 경기 내용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봉황기 결승 11-1,황금사자기 결승 14-2) 여기에는 조성민이라는 에이스도 있었지만 그를 굳이 완투시킬 필요도 없을 만큼 많은 점수를 뽑아내는 강타선이 더욱 돋보이는 팀이었다.

설종진,김재현,백재호,조성민,박연수(부상으로 전국대회는 주전으로 뛰지 못했음) 등 강타자들이 즐비한 신일고 타선이었지만 이 중 가장 돋보였던 선수는 단연 2학년 강혁이었다.강혁은 대통령배,청룡기에서 연이어 6할대의 타율로 타격상을 수상한데 이어 신일고가 우승한 봉황기에서도 5할대의 맹타를 휘두르며 91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당시 주요 언론들은 강혁과 그해 프로야구 타격 2위를 달리고 있던 장효조를 직접비교하며 강혁을 차세대 최고타자로 지목했고 이듬해 졸업반에 오른 강혁은 조성민의 졸업으로 인한 팀의 전력약화 속에서도 대통령배 타격상,31경기 연속안타 (당시 한국타이기록),두 번의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하며 기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화답했다.

강혁의 연고권을 갖고 있던 OB 역시 그를 일찌감치 윤동균의 10번을 넘겨받을 팀의 간판으로 낙점하고 끈질긴 설득 끝에 6월경 강혁과 역대 야수최고액에 (6000만원) 계약을 체결하고 9월경에 이를 발표했다. 하지만 계약 당시 강혁은 이미 한양대와 가등록이 되어 있었던데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장학금 3천만원을 미리 선급받아 놓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고졸선수의 프로 계약 기간은 11월 1일 이후로 정해져있었던터라 OB의 9월 계약발표는 아마-프로 협정서 위반을 스스로 자인한 격이었다.

하지만 계약한지 2주일도 못 되어 강혁의 부친은 OB로 찾아와 대학진학의사를 밝히고 강혁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양대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함께 진학 예정이었던 동기생들 부모로부터 (흔히 끼워팔기라고 불리는) 받은 현금이 강혁의 한양대행을 결정한 원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사례금과 한양대 측의 장학금이 프로에서 받은 계약금의 두 배를 넘자 형편이 어려웠던 강혁의 부모는 마지 못해 강혁을 대학으로 유턴시켰고 이 결정으로 인해 전도유망했던 강혁의 야구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대학으로 들어간 후에도 프로 유니폼을 잊지 못한 강혁은 11월경 한양대를 이탈한후 OB로 직접 찾아와 경호를 요청, 구단 관계자들과 함께 남원으로 은신했으나 강혁 부모의 유괴 신고로 인해 결국 다시 한양대의 훈련에 합류한다. 이때 OB와 한양대는 각각 KBO와 대한야구협회에 강혁을 선수등록, 초유의 이중등록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그해 3월 강혁은 춘계대학 선수권에 출전한다. 이에 OB는 KBO에 강혁을 임의탈퇴선수로 처리해줄것을 요구했으나 KBO(사실상 강혁의 OB행이 달갑지 않았던 나머지 7개구단)는 징계수위가 약하다는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4월 5일 OB가 강혁의 영구제명을 (선수자격 실격) KBO에 신청함으로써 강혁은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제명 선수로 기록된다.

대학에 입학한 강혁은 좌절하지 않고 4년내내 대표팀의 중심타자로 맹활약해 명성을 지켜냈지만 강혁의 부모는 매년 KBO를 찾아 강혁의 탄원서를 제출해야 했다. KBO는 강혁의 해금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실격 선수인 강혁의 우선권을 두고 구단간에 마찰이 일어날것을 우려, 매년 강혁의 해금을 미뤘고 결국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도 강혁의 해금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졸업을 앞두고 심도있게 논의되던 상황도 있었지만 역시 진전없이 시간만 길어지자 부친의 병환까지 겹쳤고 강혁은 실업 현대에 입단한다. 결국 2년뒤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거둔 후에야 강혁은 해금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 프로에서 뼈를 묻겠다."라는 다짐과 함께.

강혁의 영구제명 사건은 아마-프로의 막가파식 힘싸움과 진학비리 등 야구계의 어두운 단면들이 한꺼번에 드러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선수의 선수 등록을 강행한 OB, 아마자격을 잃은 그를 국가대표로 선발한 대한야구협회, 승부 조작 등에나 내릴 법한 영구제명이라는 어이없는 징계를 내린 KBO, 그리고 강혁의 부모까지 모두가 함께 저지른 어른들의 욕심으로 점철된 비극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OB는 강혁 사건으로 인해 스스로 패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아마야구계에 맺한 한을 풀고자 94년 또다시 손경수 등록파동을 일으킨다. 여기에 다른 구단들도 앞장서 대학에 가등록한 고교선수들을 가로채는 등 (지난회 참조) 스카웃을 둘러싼 이기주의는 양측을 끝없는 대립으로 몰고 간다.


[못다한 비하인드 스토리]

* 강혁의 성장을 막은것은 2년간의 실업행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안희봉, 조경환, 문희성, 강필선, 장재명 등 내로라하는 현대피닉스 출신 91학번 강타자들이 대부분 프로에서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 1, 2년차에 해당하는 기간을 경기 상대가 없는 실업에서 보낸것이 답보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세인들에게 아직도 회자되는 만루 고의사구 사건은 95년 춘계리그 결승전으로 석점차로 연세대가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연세대 선발투수 임선동이 2사 만루에 나온 강혁을 고의사구로 걸러 경기장에 있던 관중, 기자들을 경악시켰다. 다음 타석에서 또다시 고의사구가 나오자 관중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결국 마지막 타석에서 임선동은 정면승부를 선택했는데 결국 이것이 강혁에게 통렬한 중월 솔로홈런을 허용하고 만다. 경기는 8:6 두 점차로 연대가 간신히 승리했습니다.

* 강혁은 중학 시절 최고의 좌완투수로 활약했으며 야구를 시작한 후 고교 2학년때 처음으로 병살타를 기록했을 만큼 리틀시절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은 선수였다고 한다. 강혁의 스카우트를 위해 그의 중학시절 은사인 양승호 신일중 감독이 OB 스카우트로 임명되기도 했는데 양승호 감독이 이끄는 신일중이 기록한 38연승은 아직도 중학야구 최다연승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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