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기억의 밤' 포스터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번 보면 오래 남는 숨은 명작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유'는 나만 알기 아쉬운 콘텐츠를 찾아 이 콘텐츠를 봐야 이유를 짚어드립니다. [편집자주]
(엑스포츠뉴스 이유림 기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1693만 관객을 동원한 장항준 감독. 최근 작품을 통해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관객이라면 이전 필모그래피에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사극으로 천만 관객을 울리기 전, 치밀한 서스펜스와 예측 불가능한 반전으로 관객의 허를 찔렀던 작품이 있다. 바로 2017년 개봉한 영화 '기억의 밤'이다.
'왕과 사는 남자'가 역사 속 인물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해 묵직한 감동을 전했다면, '기억의 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개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 심리 스릴러다.
특히 초반부터 관객을 단숨에 끌어당기는 몰입감이 돋보여 가볍게 즐길 스릴러를 찾는 이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기억의 밤'은 납치된 뒤 기억을 잃고 돌아온 형 유석(김무열 분)과 그런 형을 의심하며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동생 진석(강하늘)의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다. 두 형제의 엇갈린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 역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작품은 장항준 감독이 2003년 '불어라 봄바람' 이후 14년 만에 선보인 장편 연출작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재치 넘치는 모습과 달리, 영화에서는 섬세하게 설계된 이야기와 긴장감 넘치는 연출로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영화 '기억의 밤'
영화는 1997년, 가족과 함께 새로운 집으로 이사한 진석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다정한 부모와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형 유석까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화목한 가족이다. 그러나 유석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되면서 평온했던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19일 만에 집으로 돌아온 유석은 납치 기간의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석의 눈에 비친 형은 어딘가 수상하다. 평소와 다른 행동은 물론, 밤마다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모습까지 목격되면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때부터 영화는 관객의 의심을 끊임없이 부추긴다.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가족들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석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만들어낸 착각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평범한 주택을 공포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장항준 감독의 연출이다.
어두운 복도와 계단, 굳게 닫힌 방문,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소리 등 일상적인 요소들이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활용된다. 자극적인 유혈 장면에 의존하기보다 익숙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운만으로 서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초반부의 전개는 그야말로 쉴 틈이 없다. 의심스러운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의문이 뒤따르고, 사건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미스터리가 생긴다. 제한된 공간과 인물만으로도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 장항준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 이하 영화의 주요 반전과 결말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기억의 밤'
'기억의 밤'이 단순한 납치 스릴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지점은 영화의 전제가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관객이 믿어왔던 1997년이라는 시간적 배경부터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진석은 자신이 1997년을 살아가는 21세 청년이 아니라, 2017년에 살고 있는 41세 남성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당연하게 여겼던 가족 관계 역시 모두 꾸며진 것이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실제 가족이 아니다. 20년 전 발생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진석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도록 과거의 환경을 재현했고, 형이라고 믿었던 유석 역시 그 과정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특히 유석의 정체가 과거 살인사건 피해자의 유가족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을 안긴다. 동생의 시선에서 시작된 형에 대한 의심이 결국 과거의 비극과 복수로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 '기억의 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반전 자체보다 이를 뒷받침하는 복선이다. 작품은 1997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내세우면서도 곳곳에 미묘한 위화감을 심어놓는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현대적인 건물과 자동차, 차량 번호판에 담긴 시대적 차이부터 진석이 단어를 공부하다 '최면'이라는 단어에 형광펜을 긋는 장면까지 모두 복선을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요소들이 진실을 알고 나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결국 '기억의 밤'의 반전은 단순히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인물들의 관계, 나아가 관객이 지금껏 바라본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뒤집는다. 첫 관람에서는 예상치 못한 진실에 놀라게 된다면, 두 번째 관람에서는 그 진실을 감추기 위해 치밀하게 배치된 장치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영화 '기억의 밤'
이러한 서스펜스를 완성하는 데에는 강하늘과 김무열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강하늘은 순수하면서도 불안정한 삼수생 진석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처음에는 형을 향한 의심과 두려움에 휩싸인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믿었던 현실이 무너지는 혼란과 절망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특히 모든 진실이 드러난 뒤 자신이 저지른 과거와 마주하는 과정에서는 극도의 불안과 죄책감이 뒤섞인 감정을 드러낸다. 영화 초반 관객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던 인물이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이게 되는 데에는 강하늘의 연기력이 큰 역할을 한다.
김무열 역시 극의 긴장감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다. 다정하고 모범적인 형의 모습 뒤로 알 수 없는 섬뜩함을 숨긴 그는 사소한 표정과 행동만으로도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납치 사건 이후 달라진 걸음걸이와 순간순간 드러나는 미묘한 눈빛, 샤프심을 눈앞에서 누르면서 진석을 압박하는 행동은 유석의 정체를 둘러싼 궁금증을 더욱 키운다.
이후 복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인물의 사연이 밝혀지면서, 단순히 수상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던 유석에게도 복합적인 감정이 덧입혀진다.
두 배우는 쫓고 쫓기는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폭발시키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특히 상대를 향한 의심과 공포가 점차 분노와 죄책감으로 바뀌는 과정은 영화의 반전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영화 '기억의 밤'
물론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초중반부가 워낙 강렬한 만큼, 진실이 드러난 이후 이어지는 후반부의 전개는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숨겨진 사건의 전말과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앞서 쌓아 올린 긴장감이 꺾이기 때문이다. 관객 스스로 진실을 추리하도록 이끌던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러 비교적 친절한 설명에 의존한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20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최면과 약물, 대규모 상황극까지 동원한다는 설정 역시 현실적인 개연성 측면에서는 의문을 남긴다. 정교한 복선과 달리 이를 가능하게 만든 과정에는 다소 작위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기억의 밤'이 지닌 장점은 뚜렷하다.
시작부터 관객을 붙잡는 압도적인 몰입감, 끊임없이 의심을 자극하는 전개, 그리고 모든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반전까지. 여기에 강하늘과 김무열의 폭발적인 연기가 더해지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린다.
'왕과 사는 남자'가 장항준 감독에게 대중적인 흥행의 정점을 안겼다면, '기억의 밤'은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탄탄한 이야기 구성과 장르적 감각을 갖춘 연출자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항준 감독의 작품 세계를 더 알고 싶다면 흥행작 이전에 놓인 이 심리 스릴러에도 눈길을 돌려볼 만하다.
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키위컴퍼니
이유림 기자 reason17@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