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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돈 27억'에 눈이 멀어…축구사 '최고의 배신자'가 탄생했다 [트랜스퍼 마켓]

기사입력 2023.10.20 00:00



(엑스포츠뉴스 이태승 기자)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지구촌 축구에서 가장 라이벌 구도가 뚜렷한 사이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카탈루냐의 대표 구단 바르셀로나, 두 팀 대결은 '엘 클라시코'라는 이름으로 세계 축구팬들을 사로잡는다.

그런 두 팀에서 모두 뛰면서 한 팀엔 역적 혹은 배신자로, 다른 한 팀에 레전드로 불리는 선수가 있다. 2000년 7월, 지금도 축구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적으로 불리는 사건의 주인공 루이스 피구다.

1999/2000시즌이 막 끝나 조용하던 유럽 축구계에 핵폭탄 같은 뉴스가 터졌다.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선수였던 포르투갈 국가대표 미드필더 피구가 레알 마드리드 흰색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바르셀로나 팬들은 피구를 향해 '배신자 유다놈'이라며 온갖 모욕과 욕설을 퍼부었고, 그의 행동과 앞 날에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1989년 16세 이하(U-16)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우승, 1991년 20세 이하(U-20)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현 U-20 월드컵) 우승 핵심 멤버로, 포르투갈 축구의 '골든 제너레이션' 문을 열어젖힌 피구는 1995년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뒤 2000년까지 5시즌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스페인 라리가 2연패, 국왕컵 2연패, 유럽축구연맹(UEFA) 컵위너스컵 우승 등을 바르셀로나에 가져다주며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 거듭났다.

그런 상태에서 바르셀로나의 철천지 원수 같은 구단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으니 친정팀 팬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피구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은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됐다. 피구가 바르셀로나가 싫거나, 레알 마드리드를 동경했다기보다는 당시만 해도 스페인 축구계에서 주목을 끌지 못했던 인물의 도박과 같은 행동에서 피구의 이적이 이뤄졌다.

피구의 이적은 레알 마드리드 회장 선거에서 출발한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 회장을 지내던 로렌초 산즈는 1998년 팀을 이끌고 32년 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를 우승, '소시오(구단을 응원하는 구성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2000년 7월 치러질 회장 선거에서도 가볍게 재선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신만만했다.

이 때 산즈의 당선을 막아서려는 사람이 등장한다.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고 있는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그 주인공이다. 페레스는 자신이 당선되기 위해 소시오들에게 어떤 선수를 가장 원하는지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8만3000명이 넘는 소시오들은 묘하게도 바르셀로나 에이스 루이스 피구에 투표했다. 이에 페레스는 "만약 내가 당선된다면 피구를 데려오죠. 그러나 피구가 안 온다면 내가 다음 시즌 모든 소시오들의 1년치 연회비를 전부 내드리리다"라며 당선되기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치밀한 페레스는 피구를 협상 테이블로 앉히기 위해 그의 포르투갈 대표팀 대선배이자 우상인 파울루 푸트리를 섭외했다. 푸트리 역할은 피구 에이전트인 조세 베이가의 '바람'을 잡아 피구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이었다.



게다가 페레스는 당시 피구의 바이아웃 금액이던 4400만 파운드(약 720억원)를 준비해 두기도 했다. 바이아웃이 발동되기만 한다면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고 이적료를 갈아치우는, 당시엔 매우 큰 돈이었다. 바르셀로나는 피구와 재계약을 체결할 때만 해도 저렇게 많은 돈을 낼 구단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바이아웃 금액을 설정했는데 페레스라는 강력한 상대가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피구 영입에 필요한 모든 돈을 준비한 페레스는 이후 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조건부 계약'을 내밀며 에이전트 베이가와 일종의 '내기'를 한다.

페레스는 "만약 내가 선거에서 낙선한다면 피구에게 선금 170만 파운드(약 27억원)을 주겠소. 그러나 내가 선거에서 이겼는데 피구가 레알로 안온다면 2200만 파운드(약 360억원)을 그대가 내야합니다"라며 베이가와 계약을 맺었다. 베이가는 처음엔 '굴러들어온 떡' 혹은 '꽁돈'으로 생각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산즈의 지지도가 압도적이라고 여겨 페레스 당선은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봤다. '꽁돈' 가능성에 베이가는 덥썩 페레스 손을 잡았다.

마침 피구는 주급 인상을 포함한 재계약을 요구했지만 바르셀로나는 당장 응할 수가 없었다. 바르셀로나도 회장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르면 구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는 선수의 계약에 관여할 수 없다. 바르셀로나 회장 선거를 앞둔 후안 가스파르트, 루이스 바사트, 호세프 루이스 누녜즈 등 회장 후보 3명 모두 선거 땐 회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구의 재계약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장 당선이 유력했던 가스파르트 회장은 "당선되면 재계약을 즉각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래의 약속과 지금 보이는 확실한 '꽁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피구도 점점 다른 곳으로 눈이 가게 됐다. 결국 피구는 페레스의 교활한 계획에 손을 잡았다. 페레스 당선이 말도 안되는 낮은 확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페레스는 영리했다. 페레스는 "피구와 레알 마드리드가 비밀 계약을 맺었다"고 여론에 흘렸다. 바르셀로나 팬들이 피구에게 반발심을 갖게 함과 동시에 레알 마드리드 팬들이 페레스에게 표를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득표율과 노이즈 마케팅을 한 번에 잡는 일거양득이었다.

피구는 당황스러웠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 계약을 했다고 인정하면 바르셀로나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피구의 말을 믿은 바르셀로나 팬들이 나중에 그의 이적에 배신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대목이기도 했다.




운명의 2000년 7월 16일, 레알 마드리드 회장 선거가 종료된 후 단상에 오른 이는 놀라게도 페레스였다. 소시오들의 마음을 뒤흔든 페레스가 산즈를 누르고 회장 선거 당선을 일궈낸 것이었다.

페레스 당선에 피구와 그의 에이전트 베이가는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바르셀로나 회장이 된 가스파르트는 훗날 "베이가와 피구는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며 "베이가는 걱정으로 극단적 선택을 고려할 지경이었다"고 회상했다. 피구는 꼼짝 없이 레알 마드리드로 가느냐, 아니면 360억원이라는 거금을 내놔야 하는가란 선택에 직면했다.

바르셀로나 회장에 당선된 가스파르트에게 360억원 위약금을 내달라고 간청해 봤지만, 말도 안되는 부탁이었다. 그랬다간 레알 마드리드 소시오들의 1년 연회비를 바르셀로나가 대신 지불하는 황당한 그림이 나오기 때문이다.

피구는 자기 대신 계약을 멋대로 체결한 에이전트 베이가에게 분노를 표출했지만, 피구가 아주 모르는 계약도 아니었다. 페레스 회장과 베이가, 바람잡이 푸트리, 피구까지 둘러 앉아 밤새도록 협상을 벌였고 결국 피구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페레스 회장의 치밀한 계획에 피구는 에이전트를 활용해 대응한 탓에 두 발, 세 발 뒤처질 수 밖에 없었다. 차비 에르난데스를 비롯한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에이전트를 담당하는 이반 코레챠는 "에이전트는 무엇에 서명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모른다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며 사건의 핵심을 꼬집었다.

또한 모든 것을 '장난'처럼 받아들인 것도 피구의 큰 실책 중 하나였다. 코레챠는 "'에이 설마, 불가능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일관하다가 그의 커리어 전체가 뒤바뀌었다"고 전했다.

만약 페레스 회장의 당선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조건부 합의'를 빙자한 내기 따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피구의 배신, 증오, 복수심이 레알 마드리드의 이적의 계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아니었다.

아주 작은 계기 하나가 축구사 가장 충격적인 이적으로 커졌다. 다행인 것은 피구가 레알 마드리드로 간 뒤 라리가 2회 우승, 그리고 꿈에 그리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뤘다는 점이다.


사진=연합뉴스, CNN, 문도 데포르티보, 스포르트, 바르샤 유니버셜

이태승 기자 taseaung@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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