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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 영웅 (4)] 아직 남은 꿈을 향해…'쇼트트랙의 황제' 안현수

기사입력 2010.02.10 14:20 / 기사수정 2010.02.10 14:20

김지한 기자

[엑스포츠뉴스=김지한 기자] 세계선수권 5연패, 동계올림픽 3관왕…이 정도만 해도 이 선수가 얼마나 최고의 실력을 갖췄는지 짐작이 간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왜소한 체구에 금테 원형 안경을 쓴 앳된 모습으로 주목받았던 이 선수는 이후 '세계 최고의 선수'로 거듭나며 '쇼트트랙의 황제'로 떠올랐다. 바로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전설, 안현수(성남시청)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안현수는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다.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던 지난해 4월, 단 한 번 열린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이 '전설의 선수'를 이번 올림픽에서 보지 못하는 것은 그를 기대했던 팬들에게 안타깝게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단 결단식이 열린 날, 안현수는 경남 창원에서 열린 전국 동계 체전에서 3관왕에 오르며 재기에 성공했다. 비록 지금은 대표 선수가 아니지만 4년 뒤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그동안 못다한 한을 풀기 위해 '황제' 안현수는 다시 스케이트화 끈을 고쳐 맨다.

금테 안경의 앳된 소년, 안현수의 첫 올림픽 경험

안현수는 본래 체구가 작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쇼트트랙을 시작했을 때도 작은 체격 때문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저 취미삼아 쇼트트랙을 시작했기에 어느 정도만 하면 잘하겠지 하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오히려 '신동' 소리를 들으며 최고의 스케이터로 자라났다. 1996년, 학생종별 대회에서 초등부 500, 1500m에서 1위를 차지하며 종합 우승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안현수는 대회마다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고, 동계 체전에서 3년 연속 정상 자리를 지키며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신목고 2학년이던 2002년, 안현수는 난생 처음 성인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꿈의 무대' 올림픽 무대도 밟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지만 꼭 최고 자리에는 올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잘하면 '대형 사고'도 칠 수 있었다. 

남자 1000m에서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한국 선수 가운데 유일하게 결선에 올랐기 때문이다. '맏형' 김동성이 준결승에서 리지아준(중국)의 반칙으로 넘어졌음에도 결국 탈락해 분위기가 가라앉은 마당에 안현수는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결선에서 안현수는 아폴로 안톤 오노(미국), 리지아준과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막판에 힘을 내면서 1위로 치고 올라갈 뻔했다. 하지만, 마지막 바퀴를 돌고 있는 상황에서 오노와 리지아준이 '더티한 플레이'로 상대 선수를 견제하다가 나란히 넘어졌고, 아웃 코스로 빠져나가려던 안현수도 피해를 보며 넘어지고 말았다. 4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어드벤티지'를 기대했지만 결국 결과가 뒤집히지는 않았다. 결과는 아쉬웠지만 덩치 큰 선수들 사이에서 평범한 청소년 같은 모습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안현수를 지켜보며, 많은 사람은 박수를 보냈다.

세계선수권 5연패, 올림픽 3관왕…누구도 못 해낸 것을 이뤄낸 안현수

첫 올림픽 무대가 자극이 됐을까. 안현수는 올림픽 이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직후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안현수는 독주를 펼친 김동성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라 김동성을 이을 차세대 주자로 완전히 주목받았다. 이후 김동성이 부상 후유증으로 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이, 안현수는 세계를 호령하는 스케이터가 됐다.

2003년 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2007년까지 안현수는 쇼트트랙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세계선수권 5연패 달성에 성공했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오노, 기량이 급상승하던 캐나다 선수들도 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지능적인 레이스로 안현수는 역대 한국 최고의 스케이터가 됐다.

그 정점을 찍은 것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이었다. 안현수는 남자 1000, 1500, 5000m 계주를 석권했다. 특히 5000m 계주에서 안현수는 막판 2바퀴를 남겨놓고 폭발적인 스퍼트로 앞서 나가던 캐나다 선수를 따돌리며 짜릿한 역전 우승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남자 500m에서 동메달을 따내는 등 전 종목에 걸쳐 고르게 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3관왕은 한국 스포츠 사상 유례없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파벌 문제' 등 안팎에 불거진 문제들 때문에 위상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 스스로 컨트롤을 잘 해내며 그야말로 대위업을 달성해냈다.

2008년에 안현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성남시청과 역대 최고 수준의 계약을 맺었다. '쇼트트랙의 황제'에 대한 당연한 대우였다. 전무후무한 세계선수권 6연패 달성을 위해 탄탄대로를 걸어가며 안현수는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이라는 단어와 연관이 없을 것 같았던 안현수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세 차례 무릎 수술, 올림픽 선발전 탈락…그래도 4년 뒤를 꿈꾼다

2008년 1월, 안현수는 세계선수권 준비를 위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훈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훈련 도중, 넘어지면서 펜스에 부딪히는 과정에서 무릎을 심하게 부딪히며 과거에 느껴보지 못했던 아픔을 겪었다. 결과는 왼쪽 무릎 슬개골 골절. 당장 남아있는 월드컵 대회는 물론 세계선수권 6연패의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안현수는 재활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뜻대로 재활이 이뤄지지 않았다. 수술 부위에 염증이 생기면서 두 차례나 추가 수술을 더 받은 것이다. 공백 기간이 1년이 넘으면서 예전만큼 기량이 나올 것이냐는 우려가 많았고, 3회 연속 올림픽 출전의 꿈도 완전히 물건너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올림픽 출전을 향한 의지는 대단했다. 그 나름대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안현수는 2009년 4월, 밴쿠버 동계올림픽 대표 선수 선발전에 출전하며 1년 3개월 만에 공식 경기에 나서 재기를 꿈꾸고, 올림픽 선수 선발 티켓도 따내려 했다. 하지만, 완전히 정상 컨디션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특장점인 빠른 스피드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결국, 자신의 장기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종합 7위에 머무르며, 5위까지 주어지는 올림픽 대표 선수에 선발되지 못했다.

그러나 안현수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10개월 뒤 열린 동계체전에서 다른 선수들을 여유있게 따돌리며 3관왕에 올라 옛 기량을 회복한 것이다. 만약 대표에 선발된 뒤, 꾸준히 훈련을 이어왔다면 이번 동계올림픽에서도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만큼 안현수는 좋은 경기력을 체전에서 보여줬다. 이번 체전 3관왕을 계기로 안현수는 새로운 2010-11 시즌부터 잃었던 '쇼트트랙 황제'의 명성을 완전하게 되찾겠다는 남다른 각오도 엿볼 수 있었다.

아직 안현수의 나이는 25에 불과하다. 컨디션 조절만 잘하면 충분히 4년 뒤에 열리는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그의 역주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당장 내년 시즌에 대표 선수로 선발돼 세계선수권 최다 우승의 기록을 깨는 것도 바라고 있다. 이뤄낸 것이 많지만 아직 이뤄내야 할 목표도 많은 안현수다. 빼어난 기량과 함께 남다른 의지와 투혼을 불사르며, 서른이 넘는 나이에도 현역을 꿈꾸는 안현수의 밝은 미래를 앞으로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관련 기사] ▶ [동계올림픽 영웅 (3)] '쇼트트랙 영웅' 김동성을 그리다

[사진= 안현수  (C) 엑스포츠뉴스 김경주 기자]



김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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