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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찾아서] EPL의 '작은 거인' 지안프랑코 졸라

기사입력 2009.07.11 03:51 / 기사수정 2009.07.11 03:51

정재훈 기자




[엑스포츠뉴스=정재훈기자]
올 이적시장 최고의 화두는 역시 8,000만 파운드(약 1,600억)라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이적료 기록을 세우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다.

2003년 18살의 나이로 데이비드 베컴의 7번을 승계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에 입성한 호날두는 이후 6년간 현란한 발재간과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세계 축구계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프리미어리그 3연패, FA컵, 칼링컵, UEFA 챔피언스리그, FIFA 클럽월드컵 등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2008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클럽과 개인의 이룰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차지했다.

하지만, 전설과도 같은 등번호 7번의 주인공으로 맨유의 선봉에 섰던 호날두는 이러한 활약에도 진정한 레드 데빌스가 될 수는 없었다. 놀랄만한 활약에도 호날두의 마음은 항상 레알 마드리드를 갈구하고 있었고 이를 심심치 않게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호날두에게 맨유는 클럽으로서 충족시킬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울한 도시 '맨체스터'는 축구 이외의 생활에서는 너무나도 작은 우물이었다. 결국, 호날두는 따사로운 햇빛과 미모의 여인들이 있는 마드리드로 떠나고 말았다.

이렇듯 현대 축구에서 한 팀을 대표하는 선수들의 이적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미 거대하게 부풀어버린 유럽 축구계는 이미 하나의 큰 돈 덩어리가 되어버렸고 설사 그것이 돈이 개입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프로'의 세계에서 '돈'의 가치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꼭 나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보는 이들을 씁쓸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맨유의 7번 C RONALDO 유니폼이 있는 당신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선수들이 그렇게 팀을 떠나지는 않는다. 2부리그 강등에도 팬들의 저버릴 수 없어 팀에 떠나지 않고 지켰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 지안루이지 부폰 등 수많은 로맨티스트가 축구라는 공놀이를 한층 특별하게 해준다. 프리미어리그에도 이들과 같이 특별한 존재가 있다.

에릭 칸토나, 데니스 베르캄프, 다비드 지뇰라 등과 함께 킥 앤 러쉬로 대표되는 잉글랜드 축구에 아름다운 기술을 전파시킨 바로 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성공적인 감독생활을 이어가는 지안프랑코 졸라의 이야기다. EPL의 로맨티스트 '졸라' 멋진 선수의 이야기를 해보자.

1966년 7월 이탈리아의 소도시 올리에나에서 태어난 졸라가 본격적으로 명성을 알리게 된 것은 바로 나폴리에서부터였다.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현 아르헨티나 감독)가 이끌던 나폴리는 AC밀란, 인테르 밀란, 유벤투스 등 명문을 제치고 스쿠데토를 차지하며 남부 클럽의 자존심이었다.

졸라는 마라도나의 백업 선수로 주로 교체출장이 잦았는데 재밌는 것은 체구 또한 마라도나와 매우 흡사했다. 마라도나가 팀을 떠난 후 나폴리를 이끌던 졸라는 마라도나의 그것에는 근접하지 못했지만 멋진 활약을 이어나갔고 이후 파르마로 이적해 골 폭풍을 몰아치며 1995년 UEFA컵에서 우승하며 성공 가도를 이어갔다.

클럽에서는 활약은 돋보였지만 대표팀에서는 잠시 부진을 겪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유로 96에서 8강 진출에는 실패했고 졸라 역시 패배의 비난을 면하기는 힘들었다. 이후 졸라는 당시 세리에A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받던 프리미어리그 첼시로 향했다. 이때부터 졸라는 첼시의, EPL의 전설이 된다.

첼시의 푸른 유니폼을 입은 졸라는 거칠 것이 없었다. 거친 프리미어리그에서 체구가 작은 졸라의 성공을 예견하는 전문가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졸라는 뛰어난 기술과 축구 지능으로 이를 극복하며 첼시를 FA컵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6/97시즌 축구기자협회의 올해의 선수에 뽑히게 되었다.

1996년 11월에 첼시에 합류한 졸라는 시즌 중반에 합류한 선수로는 최초로 이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거머쥐었다.

지난 2월 아스널에 합류한 아르샤빈이 맹활약 하자 잉글랜드 언론은 조심스럽게 졸라 이후에 처음으로 시즌 중반에 합류한 선수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했다. 물론 아르샤빈은 졸라의 영광을 잇지 못했다.

졸라의 환상적인 드리블과 정확한 프리킥, 창조적인 플레이에 첼시의 팬들은 열광했고 잉글랜드의 모든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작은 거인'의 활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축구뿐 아니라 그라운드 밖에서의 생활에서도 모범이 되었다. 영어에 익숙지 못한 졸라는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며 빠른 적응을 위해 노력했고 축구 외적인 사생활에서도 모범적인 생활을 보이며 팬들의 아낌없는 지지를 받았다.

성공적인 생활을 이어가던 졸라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약 6년간 첼시에서 활약한 졸라는 흘러가는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고 로만의 등장과 함께  막대한 자본에 의한 뛰어난 선수들의 영입으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자리를 잃은 졸라는 줄곧 은퇴는 고향팀에서 하겠다던 다짐대로 고향팀 칼리아리로 이적을 결심한다. 2003년 칼리아리는 당시 세리에B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황혼을 불태운 졸라의 활약에 세리에A로 승격하는 감격을 맛본다. 불혹이 가까운 나이에도 그의 클래스는 영원했다.

졸라는 첼시를 떠났지만 팬들은 졸라를 떠나지 않았다. 졸라를 잊지 못하는 수많은 첼시의 팬들은 주말이 되면 이탈리아로 날아가 졸라의 플레이를 감상했고 첼시의 기념품 스토어에는 첼시의 혹은 칼리아리 ZOLA의 유니폼이 판매되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등 졸라의 인기는 시간을 무색게 했다. 게다가 졸라는 6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넘는 첼시 클럽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로 뽑히는 영광을 얻었다.

지금과 같이 빅4로 꼽히며 잉글랜드와 유럽을 호령하던 첼시는 아니었지만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첼시의 최고 레전드 졸라는 지난해 9월 웨스트햄의 지휘봉을 잡으며 감독의 전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시즌 초반 부진한 성적으로 감독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내 자신의 능력을 지도자 세계에서도 펼쳐보이며 리그 10위로 끝마치며 비교적 성공적인 시간을 보낸다. 특히 스콜라리 감독이 해임된 이후 첼시의 새 사령탑 후보에 거론될 정도로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입증하게 되었다.

다가오는 2009/10시즌에도 변함없이 웨스트햄의 지휘봉을 이어가는 졸라가 웨스트햄을 잘 이끌어 몇 년 뒤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팬들을 위해 첼시의 수장으로 다시 컴백할 수 있을 수 있을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다시 첼시를 위해 자신을 바칠 것인가는 이미 관심 밖이다. 첼시의 영원한 전설 졸라는 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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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지안프랑코 졸라(C)웨스트햄 팬페이지 KUMB.COM 캡쳐]

 



정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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