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5-16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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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욱 선수의 은퇴 소식을 듣고

기사입력 2005.05.23 00:37 / 기사수정 2005.05.23 00:37

김광수 기자
 


개인적으로 그를 처음 본 것은 1993년 LG와 삼성의 대구 주말 3연전 경기였다. 당시 LG는 반게임차로 2위를 달리고 있었고 그 밑에서 삼성이 추격하고 있는 양상이었다. 아직도 내가 본 경기중에 최고의 명승부로 꼽는 그 경기. 삼성이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끝에 이종두 선수의 끝내기 2루타로 10-9로 승리하며 2위를 탈환하여 결국 상대전적 3승 9패의 열세에도 불구 주말 3연전을 싹쓸이했다. 그 경기에 잠깐 올라온 투수가 김현욱 선수였다. 그 선수는 1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다음 투수인 한희민 선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줬다. 그를 처음 본 것이 그때였다.



그 후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날 김현욱 선수의 인상적인 피칭을 지켜본 후 바로 팬북을 들여다 보았다. 당시 기억나는 것은 신인이었던 정영규, 박충식, 양준혁 선수를 유망주라고 소개한 기사와 함께 플레이 하는 사진이 나와있는데 반해 김현욱 선수는 팬북 끝편에 상반신 사진과 함께 간단한 프로필이 나와 있는 것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1이닝 동안 인상적인 피칭을 펼친 그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그가 경북고를 졸업한 대구 선수라는 것과 계약금 2,500만원의 2차 3번지명 선수였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개인적으로 삼성에서 눈여겨 봐야할 선수 리스트에 한기철, 최한경, 김인철, 박용준 선수 다음으로 김현욱 선수를 추가해 놓았다. 아무래도 투수로서는 마른 체구에 이태일 선수 이후 볼 수 없었던 언더핸드 투수로서 유연하게 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경기 이후 그라운드에서 그를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눈여겨 봐야할 선수중에 다른 선수들은 주전으로 혹은 백업으로 볼 수 있었으나 유독 김현욱 선수만큼은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내 기억속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돌격대 유니폼을 입은 김현욱을 만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96년. 다시 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푸른색 유니폼이 아닌 돌격대의 회색 유니폼이었다. 중계방송으로 경기를 지켜보다가 그의 투구가 생각이 났다. 당시 하일성 해설위원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참, 성실한 선수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돌격대 유니폼을 입은 사연이 알게 되었다. 1995년 김태한 선수 외에는 왼손투수를 찾아보기 힘든 그 때 삼성에서 잠깐 코치를 지냈던 성기영 2군 감독의 요청으로 최한림 선수와 맞트레이드 되었으며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지난 2년간 단 한경기도 1군 경기에 등판하지 않았다는 사연이었다. 당시 투수 코치였던 권영호 코치가 김현욱 선수의 트레이드에 결사반대를 했었으나, 순위에 눈이 멀었던 삼성 프런트는 그의 의견을 묵살, 결국 이 트레이드를 강행했다고 한다.
 

쌍방울 유니폼을 입었지만 이제야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그를 만났고, 스포츠 신문의 그의 기사를 눈여겨봤다. 그해 그가 거둔 성적은 중간계투로서 49경기에 출장해 4승 1패 3세이브 2.63의 성적이었다. 무릎 부상으로 지난 2년간 눈물젖은 빵을 먹었던 그에게는 화려하지는 않은 성적이었지만 놀라운 결과였음은 어느 누구라도 부인할 수는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의 활약이 뒷받침 되었던 것일까. 쌍방울은 그 해 패넌트레이스 3위의 성적으로 창단 이후 처음 포스트 시즌의 진출하는 기쁨을 맛봤다.



최고의 활약을 펼친 2년


수능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던 고 3시절. 시즌 중반부터 헤드라인을 차지하고 있는 두 선수를 보게 되었다. 해태의 에이스로 우뚝 선 이대진 선수와 중간계투 에이스라는 개념을 도입한 김현욱 선수.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야구장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었던 그해에 간간히 산 스포츠 신문의 기사에 그가 있는 사실에 큰 힘을 얻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성실하던 이 선수가 빛을 보는구나. 아마 그 이후였던 것 같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성실” 이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생각을 했던 것이.
 

하지만 웬일인지 시즌 막판이 되자 돌격대의 마운드를 홀로 지키고 있던 그가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김성근 감독이 그를 타이틀 홀더로 만들기 위해 이기는 경기에까지 그를 내보냈다는 비난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쌍방울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함부로 하기는 힘들 것 같다.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타구단에서 방출된 선수를 끌어 모아서 어렵게 꾸려나갔던 팀-삼성 선수가 많아 삼성의 2팀이라고도 불렸다-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약한 선발진 보다는 확실한 믿을맨이었던 그에게 더 출전기회가 많았었고 그는 그런 감독의 부름에 의해 좋은 투구로 활약을 보였을 뿐이었다.
 

팀이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기는 했지만 그 해 그는 절반이 넘는 70경기에 등판, 20승 2패 6세이브 1.88의 뛰어난 성적을 거둔다. 다승, 승률, 방어율 1위. 누가 봐도 골든글러브를 차지할 성적이었지만 그는 언론의 비난과 10연속 탈삼진의 신기록에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안긴 이대진 선수에 막혀 결국 고배를 마신다. 그의 골든글러브를 장담했던 나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시즌 막판의 비난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피칭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골든글러브는 그가 차지했어야 옳은 것이라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물론 이대진 선수의 활약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도 충분히 골든글러브의 자격이 있었고 수상을 한 것이다. 팀사정상 사정없는 등판과 무릎부상과 방출이라는 아픔을 딛고 거둔 3관왕의 성적이 너무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이듬해에도 중간계투 에이스로서 68경기에 출장 13승 7패 4세이브의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많은 비난을 퍼붓던 팬들에게 자신의 진가를 인정하는 성적이었다. 팀이 망가져간 시기였기 때문에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지난해 왜 그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어야 하는지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중간계투 에이스로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활약을 펼쳤다.



그를 다시 삼성에서 만나다


1997시즌이 끝나고 우승에 눈이 멀었던 삼성은 현금 20억을 쏟아부어 쌍방울로부터 김현욱, 김기태 선수를 영입한다. 많은 팬들이 돈성이라며 비난을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현욱 선수가 다시 푸른색 유니폼을 입는데 대한 환영이었다.
 

삼성에서 그는 여전히 중간계투로 활약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성적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쌍방울 시절의 명성만을 보고 팬들에게 “20억 주고 데려와서 그 정도 밖에 못하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무릎과 허리 두 차례의 대수술의 후유증을 딛고 전천후 등판으로 빈약했던 삼성의 허리를 책임졌다. 강한 선발진에 비해 중간계투가 허약해 뒷심이 부족했던 삼성은 그가 든든하게 허리를 책임진 덕분에 2001~2002시즌에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특히 2001~2003시즌에 달성한 94경기 연속 무패행진은 44경기 연속 무패기록을 달성한 선동열 선수와 1997년 자신이 기록한 57경기를 넘어 대단한 기록이었다.  2002년에는 오봉옥 선수 이후 두 번째로 승률 100%를 달성하며 10승을 거둬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hy이 기록에도 혹자들은 말이 많다. 2002년의 8승에서 시즌 막판 두 경기에서 2승을 거둬 기준 승수인 10승을 채웠는데다 오봉옥 선수는 선발로서 기록한 성적이지만 김현욱 선수는 시즌막판 밀어주기로 기준 승수로 차지한 승률왕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94경기 연속 무패행진 경기도 중간계투로서 달성한 기록이기 때문에 무의미 하다는 혹평까지 들어야 했다. 그 혹자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김현욱 선수가 그런 밀어주기 때문에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던가? 기록이라는 것은 본인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절대로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김현욱 선수는 당시 기록을 낼 수 있는 조건이 조금 좋았을 뿐이었다. 아니, 팀사정상 혹사를 감수해가며 잦은 등판을 해야했던 그 상황에서도 언제나 기대에 부응했던 선수였다. 그의 대기록은 결코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무릎과 허리 부상을 딛고 팀이 원할 때 언제나 대기하고 있었던 그의 성실함이 만들어낸 “실력”이다.

2002년에는 그 노력의 결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도 한다. 선수생활 이후 처음으로 맞본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수많은 비아냥과 고질적인 부상으로 이루어낸 값진 우승이었다.
 

이후 그는 부상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릎과 허리부상. 2003년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부상은 좀처럼 그를 1군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2004년에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2패만 기록.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언젠가는 1군무대에서 다시 재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랬다. 아니 그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성실함 앞에 부상은 항상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은퇴, 1군 보조코치로 변신


하지만 이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지난 20일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만큼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는 이유였다.
 

“그래도 나같이 복받은 선수는 없다. 무명선수로 방출의 위기까지 몰렸다가 다승왕도 오르는 등 나름대로 스포트라이트도 받아봤기 때문에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밖에 없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현욱이 들어와, 현욱이 나가”처럼 팀이 부르면 언제든이 구원이든 패전처리든 상관없이 등판한 그는 통산성적 519경기 71승 31패 22세이브 55홀드 2.99의 성적을 남겼다. 특히 경기수는 통산 7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현역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임창용, 권오준 선수가 영향을 받은 투수로 김현욱 선수를 꼽을만큼 그의 특유의 성실함이 많은 후배에도 귀감이 됐다. 그의 기록을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이유다.
 

이제는 1군 보조코치로서 그는 다시 그 명성을 전수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중간계투 신화를 남기며 1막을 막을 내린 김현욱 선수의 제 2막은 이제 시작되었다.


사진출처 : 삼성라이온즈 홈페이지(http://www.samsunglions.com/)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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