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대로 만든 한국 코미디 영화를 찾기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극장에서는 누적 관객 26만 명에 그쳤던 하정우 감독의 영화 ‘로비’가 넷플릭스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오늘(24일) 기준 넷플릭스 대한민국 TOP10 영화 9위에 오르며 "이런 영화를 왜 놓쳤는지 모르겠다"는 반응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25년 4월 2일 개봉한 ‘로비’는 106분 분량의 드라마이자 블랙코미디다. 연구밖에 모르던 스타트업 대표 창욱이 4조 원 규모의 국책사업을 따내기 위해 생애 첫 로비 골프에 뛰어드는 이야기를 그린다. 하정우가 연출과 주연을 동시에 맡은 세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2015년 ‘허삼관’ 이후 10년 만에 선보인 감독 복귀작이다.
극장 흥행은 아쉬웠지만, 영화의 말맛은 살아남았다
개봉 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로비’는 개봉을 앞두고 예매율 상위권에 오르며 ‘승부’와 함께 한국 영화의 흥행을 이끌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특히 하정우 감독 특유의 유머와 대형 배우들의 앙상블이 강점으로 꼽히며 개봉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평단 역시 작품의 개성을 높이 평가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독기와 재기를 품은 말들이 서로를 찔러가며 리드미컬하게 필드 위를 굴러간다"고 했고, 허남웅 평론가는 "가장 잘할 줄 아는 말맛 소동극의 연출로 돌아왔다"고 평가했다. 오진우 평론가는 "대중적으로 풀어내 살짝 아쉽지만 여전히 웃긴 하정우의 코미디"라는 평을 남겼다.
하지만 극장 성적은 기대만큼 이어지지 못했다. 최종 관객 수는 약 26만 명. 화려한 출연진과 개봉 전 화제성을 고려하면 다소 아쉬운 결과였다.
그럼에도 작품을 본 관객들의 평가는 시간이 갈수록 달라졌다. "하감독의 유머가 듬뿍 담긴 영화", "쉴 틈 없는 대사에 웃다 보니 시간이 순삭됐다", "이동휘가 너무 웃기다", "배우들이 대사를 완벽하게 살렸다"는 입소문이 꾸준히 이어졌다.
넷플릭스 오늘 대한민국의 TOP10 영화 진입
OTT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최근 넷플릭스 대한민국 TOP10 영화 순위에 이름을 올리며 극장 개봉 당시보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최근 한국 코미디 영화가 줄어든 상황에서 ‘로비’는 대사와 캐릭터 플레이만으로 웃음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상황극보다 인물들이 주고받는 말맛과 리듬, 계산적인 심리전에서 웃음이 터진다는 점이 이 영화만의 차별점이다.
"하정우 말맛을 곁들인 차주영 연기가 압권", "다들 뻔뻔한 얼굴로 쉴 새 없이 주고받는 핑퐁이 웃기다", "예상 못 한 타이밍에 저항 없이 터진다", "하정우 원래 웃긴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영화도 정말 웃기다" 등 추천 후기가 이어지고 있다.
영화 '로비'가 '오늘 대한민국의 TOP 10 영화'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4조 원 사업을 둘러싼 웃픈 로비
영화는 연구밖에 모르던 스타트업 대표 창욱이 라이벌 회사 대표 광우의 뒷거래로 번번이 기회를 빼앗기면서 시작된다.
창욱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는 4조 원 규모의 국책사업이다. 하지만 이미 로비의 귀재인 광우는 장관 측 인맥을 선점한 상태. 결국 창욱 역시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로비'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골프였다. 실무를 쥔 최실장이 여자 프로골퍼의 열성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창욱은 골프 접대를 준비한다. 하지만 같은 날 광우 역시 유명 배우와 골프장 대표의 아내를 앞세워 같은 골프장에서 접대에 나서면서 상황은 예측 불가능하게 꼬여간다.
특히 골프 초보인 창욱이 급하게 연습한 뒤 오히려 공이 너무 잘 맞아버리는 장면은 영화의 대표적인 웃음 포인트다. 접대를 위해서는 적당히 져야 하는데, 뜻밖의 실력이 오히려 모든 계획을 망쳐버리는 아이러니가 폭소를 자아낸다.
골프가 인생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듯, 로비 역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는 이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블랙코미디 특유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영화 '로비' 스틸컷
진지해서 더 웃긴 배우들의 연기 차력쇼
'로비'가 재평가받는 또 다른 이유는 배우들의 앙상블이다.
하정우를 비롯해 김의성, 이동휘, 박병은, 박해수, 최시원, 차주영, 강말금, 강해림 등 개성 강한 배우들이 각자의 욕망을 품은 인물들을 연기한다.
김의성은 능청스러운 최실장 캐릭터로 극의 긴장감과 웃음을 동시에 책임지고, 이동휘는 특유의 타이밍과 리듬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최시원은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로 극에 활력을 더한다. 특유의 진지한 표정과 과감한 연기가 캐릭터의 허술한 매력을 살려낸다. 차주영 역시 예상 밖의 코미디 감각으로 신선한 재미를 더한다.
박병은과 박해수는 진지한 얼굴로 상황 자체를 웃음으로 만들고, 강말금은 품위와 속물근성을 오가는 연기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누구 한 사람의 원맨쇼가 아니라 캐릭터들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웃음을 만드는 '앙상블 코미디'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홍보했다"
하정우에게도 '로비'는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었다.
개봉을 앞두고 급성 충수돌기염으로 응급 수술을 받은 그는 퇴원한 지 3일 만에 관객과의 대화(GV)에 참석했고, 이후 예능과 라디오, 유튜브, 'SNL 코리아'까지 직접 출연하며 데뷔 이후 가장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홍보를 해본 적은 처음"이라며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다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로비'는 감독 하정우의 노선이 가장 정확해진 작품"이라며 "'롤러코스터'에서 시작된 제 코미디 스타일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흥행 결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더라. 주어진 대로 성실하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담담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영화 '로비' 포스터
요즘 웃을 일이 없다는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로비'는 모든 사람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코미디는 아니다. 빠른 대사와 블랙코미디 특유의 감성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우들이 진지하게 연기할수록 더 웃기고, 상황보다 대사와 캐릭터의 호흡에서 재미를 찾는 관객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이다.
극장에서는 26만 명을 만난 뒤 조용히 막을 내렸지만, OTT에서는 다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최근처럼 웰메이드 한국 코미디를 찾기 어려운 시기라면 한 번쯤 꺼내볼 만한 작품이다.
하정우가 개봉 당시 관객들에게 남긴 바람은 단순했다.
"와서 웃고 가셨으면 좋겠다."
사진=엑스포츠뉴스DB, 넷플릭스
※ '로비'에서 가장 큰 아쉬움은 공식 예고편이다. 영화의 핵심인 말맛과 앙상블 코미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면서 실제 작품의 매력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다. 영화를 본 뒤 "예고편 때문에 놓친 작품"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