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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아메리까노] 우루과이의 1924년 남미 축구혁명

기사입력 2011.03.29 03:00 / 기사수정 2011.03.29 03:02

윤인섭 기자

[엑스포츠뉴스=윤인섭 기자]

- 국내 유일의 남미축구-문화 매거진 '수다메리까!' / 3월 넷째 주, 풋볼 아메리까노(20)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스포츠' 축구는 오늘날 가장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전유럽과 남미에서 축구가 주요한 대중 문화의 일원이 되었고 20세기 중반에는 축구의 보급이 세계지도와 거의 맞먹는 형세가 되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은 이러한 축구의 세계화가 첫 번째 중대한 전환점을 맞은 대회이다.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우루과이가 매혹적인 축구로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 유럽의 전유물이던 축구가 '남미'의 세기와 우아함을 더해 이후 세계 축구의 축을 둘로 나눴기 때문이다.

이번 시간에는 남미 축구가 전유럽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린 1924년으로 시간을 되돌려보겠다. 유럽 중심의 세계 축구사에서 우루과이의 '혁명적인 데뷔'는 그 비중이 축소됐지만, 우루과이의 1924년 올림픽 우승은 이후 남미 축구가 세계 축구의 주도자가 되는 그 시초가 되었고 힘과 체력밖에 모르던 유럽 축구가 개인기와 패싱력에 눈을 뜨게 되는 축구 전술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했다.

혁명전야: 축구의 남미화

'근대 축구'가 영국에서 시작됐듯, 남미에서 축구의 시작도 19세기 후반 영국인 이민과 밀접히 관련됐다. 아르세날(Arsenal), 뉴웰스 올드 보이스(이상 아르헨티나), 리베르풀(Liverpool, 우루과이), 에베르톤(Everton, 칠레) 등 남미 축구클럽에는 이러한 영국 이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경우가 여럿이다.

그 밖에 이탈리아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에서의 광범위한 이민도 남미에서 축구의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유럽 이민의 접근이 용이했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등이 태평양에 위치한 칠레나 페루, 콜롬비아에 비해 보다 질 높은 축구 문화를 갖추게 됐고 보다 빠르게 '유럽화', '근대화' 물결을 탔다. 

물론, 남미 축구의 초창기에 축구란 영국인 이민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영어교사나 철도회사 직원 등, 사회 중산층을 이룬 영국 이민자들은 노동자로 이뤄진 이탈리아 이민자나 주로 1차 산업에 종사하던 '크레오쇼(독립 이전 정착한 이들)'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윤택했고 아직까지 세계 축구계에서 독보적이던 영국 축구를 직접적으로 느낀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결성한 클럽들은 월등한 실력차로 남미 축구의 초창기 리그를 대부분 독식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이르러 수적으로 절대 소수였던 영국인의 시대는 종식을 고한다. 축구는 빠른 속도로 전 사회계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고 크레오쇼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결성한 클럽들이 자국리그의 지배권을 획득해 나갔다.

나씨오날(우루과이, 크레오쇼), 보카 후니오르스(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이민자), 코린찌안스(브라질, 다국적 노동계급)로 대변되는 이들 클럽은 상대적으로 거구의 영국인 클럽을 상대하기 위해 힘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짧고 세밀한 패스와 기민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개인전술을 중시했고 이는 남미 지역에서 축구의 지배적인 스타일로 자리잡는다.

페냐롤(우루과이)과 같은 영국인 이민자 클럽도 이런 추세에서 더 이상 영국인만 고집하는 정책에서 탈피, 왜소한 크레오쇼나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이들의 세밀한 축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클럽 생존의 유일한 길이 되었다.

이미 내부적으로 유럽의 '힘 축구'에 대한 내성을 기른 남미 축구가 첫 세계 대회 경험(1924년 올림픽)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1916년에 시작된 남미 축구선수권(현 코파 아메리카, 올림픽을 제외한 영국 이외 지역의 첫 국가 대항전, 1927년까지 매년 개최)를 통해 매년 실력을 겨루며 탄탄한 국제 경쟁력을 획득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입은 유럽과 달리, 전쟁에 대한 고민 없이 '부유한 경제력(당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세계적 경제 부국이었음)'으로 축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도 남미 축구의 '충격적'인 올림픽 데뷔에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1924년, 우루과이의 남미 축구혁명

우루과이는 자국에서 열린 1923년 남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아르헨티나를 2-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 남미 대표로 파리 올림픽 참가를 확정했다. 남미팀의 첫 올림픽 진출이고 우루과이 대표의 첫 유럽 원정이었다. 당연히 유럽팀 입장에서 우루과이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고 우루과이를 주목하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그 어느 팀도 우루과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회전에서 동유럽의 복병 유고슬라비아를 7-0으로 대파한 데 이어 2라운드에서 미국을 3-0으로 완파했다. 우루과이의 '특별한' 스타일은 확실히 매혹적이었지만, 여기까지는 우루과이의 강세가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8강에서 지난 대회 4위팀인 강호 프랑스를 5-1로 대파하자 우루과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비로소 달라졌다.

준결승 상대는 전 대회 3위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우루과이의 세밀한 플레이를 막기 위해 수비를 단단히 했고 강한 몸싸움으로 우루과이를 괴롭혔다. 게다가 전반 32분, 주포 코르넬리스 피지가 선제골을 터트리며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역시 우루과이의 후반 공세에 패배를 면할 수 없었다. 우루과이는 왼쪽 공격수 페드로 쎄아가 후반 17분 동점골을 성공했고 후반 36분에는 전설적 공격수 엑토르 스카로네가 페널티 킥으로 역전골을 뽑아내 대회에서 가장 힘겨운 승리를 거뒀다.

결승 상대는 8강에서 우승후보 이탈리아를 꺾은 스위스였다. 그러나 4강에서 한 차례 위기를 벗어난 우루과이에 스위스는 그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반 9분, 19세의 신예 공격수, 페드로 페트로네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후반, 쎄아와 앙헬 로마노의 연속골이 터지며 스위스를 3-0으로 가볍게 무너뜨린 것이다.

5전전승, 20득 2실점의 완벽한 우승이었다. 비록, 한층 강화된 아마추어 조건으로 강호 영국과 덴마크가 불참했지만, 우루과이의 우승과 그들의 세밀한 축구는 유럽 축구계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유럽 축구는 한동안 남미 축구의 기세에 눌려 라이벌의 등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25년에는 아르헨티나의 보카 후니오르스와 우루과이의 나씨오날이 유럽 원정에 나서 유럽 굴지의 명문 팀과 대표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률(보카: 15승1무3패, 나씨오날: 26승7무5패)을 기록, 남미 축구의 올림픽 제패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고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격돌(2차전 접전끝에 우루과이 우승), 남미 축구의 우위를 지속했다.

그리고 1930년 제1회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 초대 우승을 차지, 프로페셔널 대표로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려던 유럽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혁명의 주역들

페드로 페트로네(1905-1964, 중앙 공격수)

파리 올림픽 최고의 스타이다. 당시 19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182cm의 장신을 앞세워 강력한 헤딩과 정확한 슈팅력으로 7골을 득점,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난 페트로네는 1920년대 우루과이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다. 1923년, 18세의 나이에 참가한 남미선수권에서 득점왕에 올랐고 1924년 올림픽과 남미선수권, 1927년 남미선수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우루과이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0년 1회 월드컵 당시에는 '외팔잡이' 공격수, 엑토르 카스트로에 주전자리를 뺏겨 단 한 경기에 출전했다. 

클럽팀에서는 나씨오날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하며 1924년~1931년까지, 7년간 무려 146골을 득점했다. 1931년에는 이탈리아 세리에-A 피오렌티나로 이적했고 이적 첫 해, 25골을 폭발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33년 나씨오날로 복귀했고 한 시즌을 마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호세 안드라데(1901-1957, 우측 미드필더)

올림픽 축구에 출전한 최초의 흑인 선수로 펠레에 앞선 제1의 '검은 진주'이다. 오른쪽 하프(2-3-5전술의 우측 미드필더)가 주포지션이고 영리하고 깔끔한 플레이로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혔다. 1901년, 우루과이 북동부의 살토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브라질에서 탈출한 흑인 노예였고 어머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백인 여성이었다.

어린 시절, 구두닦이, 신문배달원, 카니발 연주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 20세가 돼서야 전문축구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자신의 축구 재능을 뽐냈고 1923년에는 국가대표로 선발되기에 이른다. 이후 우루과이의 올림픽 2연패와 초대 월드컵 우승, 세 차례의 남미 선수권 제패를 이끌었고 클럽 레벨에서는 나씨오날의 1920년대 후반 황금기를 주도했다. 1930년 월드컵 이후, 나씨오날의 라이벌 페냐롤로 이적했고 1930년대 중반에는 아르헨티나에서도 활약했다.

선수 생활 은퇴 후에는 한동안 파리에 거주하며 '탕고' 댄서로도 활약했지만, 지도자 생활은 갖지 않았다. 말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재산을 탕진, 빈곤한 삶을 영위하다 결핵으로 숨졌다.

페드로 쎄아(1900-1970, 왼쪽 공격수)

페트로네와 우루과이 공격을 이끌며 대회 4골을 기록했다. 국제무대에서 득점왕에 오른 적은 없지만, 쎄아는 결정적인 득점으로 우루과이의 우승에 기여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4강, 네덜란드전에서 1-1 동점골로 팀의 2-1 역전승에 초석을 다졌고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4강에서도 이탈리아를 맞아 1-1 동점골을 기록, 팀의 3-1 역전승을 이끌었다.

1930년 월드컵 결승, 아르헨티나전에서는 후반 12분, 천금 같은 2-2 동점골을 기록, 우루과이가 4-2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보탰다. 쎄아는 1회 월드컵에서 결승 득점 포함, 5골로 아르헨티나의 기셰르모 스타빌레(8골)에 이어 득점 2위를 차지했다.

쎄아는 1900년, 스페인 북부의 갈리시아 지방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우루과이로 이민 왔다. 1922년, 몬테비데오의 아틀레티코 리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나씨오날로 이적하며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1935년,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고, 1942년에는 남미 선수권에서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사진=파리 올림픽 결승 우루과이-스위스, 호세 안드라데(C) 엔라쎄스우루과쇼.com, 풋볼-히스토리.net]  
 

[엑스포츠뉴스 스포츠팀]
 



윤인섭 기자 SPORTS@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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