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4-2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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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요한 "대사관 직원 거짓말로 광주 들어가...5·18 직접 겪었다" (선녀들)[전일야화]

기사입력 2021.05.17 06:51 / 기사수정 2021.05.17 02:17

유은영 기자

[엑스포츠뉴스 유은영 기자] 인요한 교수가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었다고 밝혔다. 

16일 방송된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이하 '선녀들')에서 선녀들은 광주 금남의 중심에 위치한 전일빌딩으로 향했다. 전일빌딩 외관에는 여러 탄흔이 가득했다.

이날 선녀들은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목격한 인요한 교수를 만나기도 했다. 인요한 교수는 "4대째 한국 생활을 하고 있다"며 "순천이 고향이다. 우주의 중심 순천"이라고 말해 선녀들을 웃게 했다.

인요한 교수는 "1980년 5월 25일 순천에 내려와 있었다. 그때 전남대, 조선대 친구들이 끔찍한 소식을 말해줬다"며 "미국 선교사들을 보러 가는 대사관 직원 행세를 하며 광주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는 "검문소를 7개를 통과해서 들어갔다. 처음 본 건 '뭉쳐라 전남 우리밖에 없다'라는 현수막이 걸린 버스였다"며 "하루 동안 통역을 했다. 2주 후에 주동자로 대사관에 불려갔다"고 했다.

심용환은 "당시 계엄군이 휘두른 진압봉은 시민들의 머리를 가격했다. 피해자들은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됐다"며 "첫 희생자는 24살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다. 공수부대 서너 명이 한 번에 진압봉을 휘둘러 뒤통수가 깨지고, 왼쪽 눈이 터지고, 어깨와 팔이 부러지고, 엉덩이와 허리뼈가 부러진 상태로 실려온 뒤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5월 19일에는 시민을 향한 최초의 발포가 이뤄졌다. 총에 의한 첫 희생자는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 김영찬 군은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된 후 다섯 차례 수술 후, 약 사흘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인요한 교수와 선녀들은 최후의 항쟁지인 도청으로 이동했다. 당시 도청 내부는 계엄군에 대한 대책회의로 분주했다. 나이 든 시민들과 학생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계엄군과 협상 불가하고 시민들은 협상하자고 했다. 

인요한 교수는 "당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외신기자들에게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앤드류 나고스키라는 친구가 나타났다. (내게) 기자회견 도와주겠냐고 해서 통역을 맡았다"고 밝혔다.

이어 "외신기자는 7~8명이었고, 시민 대표는 30대 초반이었다. 그는 '북쪽을 향하는 총이 왜 남쪽을 향하는지 모르겠다. 우린 억울하다. 우리는 아침마다 반공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를 부르고 나간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인요한 교수는 특히 "그가 제 손에 뭘 쥐어줬냐면 사망자 명단을 줬다. 허름한 종이에 필기체로 써놨는데 그걸 제가 복사해 나오지 않은게 한이다. 공식 통계하고는 집계가 다르지만, 공수부대가 도청을 진압하기 전 사망한 명단이다"라고 털어놨다.

enter@xportsnews.com / 사진=MBC 방송화면

유은영 기자 yoo@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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