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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영욕의 그 이름, '16강'

기사입력 2010.06.22 09:33 / 기사수정 2010.06.22 10:32

전성호 기자

[엑스포츠뉴스=전성호 기자] 월드컵 16강은 한국 축구의 오랜 염원이자 숙제였다. 월드컵 본선에서 16강에 오른다는 것은 세계 축구의 중심에 선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지금은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출전할 정도로 아시아에서 한국 축구의 입지는 독보적이지만, 한 때는 출전 자체가 도전의 영역이었다. 대한민국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후 무려 32년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5번은 예선에서 탈락했고,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은 당시 북한과의 대결을 부담스럽게 느낀 정부의 결정으로 벌금까지 내고 불참했다. 심지어 1958년 스웨덴월드컵 때는 협회 직원이 출전 신청서를 분실하는 바람에 참가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한국 축구는 메르데카컵, 팍스컵 등의 아시아 국가간 대항전에 몰두했다. 그러나 1984년 청소년월드컵 4강 진출 이후 1986년 멕시코월드컵 출전을 기점으로 한국 축구는 세계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당시로선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기던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을 향한 도전의 역사가 시작된다.

첫 도전과 좌절: 1954 스위스월드컵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대회다. 한국은 아시아 지역에 배정된 1장의 티켓을 획득하기 위해 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일본인에게 결코 한국 땅을 밟게 할 수 없다며 홈 경기를 포기, 일본과의 2경기를 모두 원정으로 치렀다. 선수들은 '패배하면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라는 각서를 쓰고 경기에 나섰고, 결국 1승 1무로 본선행 티켓을 따내게 된다.

그러나 한국 축구는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예선 두 경기에서 헝가리전 0-9, 터키전 0-7의 대패. 승점은커녕 득점조차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1954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1년밖에 안된 시점이었고, 대표팀은 비행기표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해 미 공군 수송기를 타고 64시간을 비행한 끝에 경기 시작 10여 시간 전 현지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은 고사하고 여독도 안 풀린 채 경기를 치렀으니 정상적인 경기력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스위스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가 세계와의 격차를 실감한 것만은 분명했다.

32년 만의 세계무대 복귀: 1986년 멕시코월드컵

무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대한민국. 그러나 조별예선에서 이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 전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 유럽의 복병 불가리아와 한 조가 되는 불운을 겪었다. 16강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나 멕시코월드컵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우선 박창선이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대한민국의 월드컵 첫 득점을 기록하는 감격을 맛봤다. 김정남 당시 대표팀 감독에 따르면 0-3으로 뒤지고 있었음에도 박창선이 골을 넣는 순간, 마치 승리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얼싸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불가리아를 상대로는 무승부를 거둬 본선 첫 승점도 따냈고, 이탈리아전에서는 참패를 당할 것이란 일반의 예상을 깨고 후반 막판까지 상대를 괴롭히며 2-3으로 석패했다. 이 경기에서 허정무 현 대표팀 감독은 후반 38분 한 골 차로 따라붙는 만회골을 넣기도 했다.

비록 3경기 1무 2패, 4득점 7실점의 보잘것없는 성적이었지만 의미 있는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복귀무대였다.

세계와의 격차를 확인: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86년에 이어 2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한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는 '절대 강자'로 군림했지만 세계무대에선 여전히 약자였다. 특히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실패로 점철된 대회였다.

해외 리그를 경험한 선수도 적었고, 당시의 정보 수집력은 지금에 비해 너무 낮았다. 협회의 지원도 빈약했고, 아시아 축구에 대한 편견으로 어느 나라도 한국과 평가전을 치르려 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다. 특히 시차 적응에 1주일이면 충분할 줄 알았지만 오판이었다. 선수들의 컨디션은 바닥을 쳤다. 이회택 당시 대표팀 감독의 전술 능력에도 의문 부호가 붙었다.

결국,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와 한 조에 속한 한국은 아시아 예선 무패의 기록이 무색하게 3전 3패, 1득점 6실점으로 54년을 제외하면 가장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한국 축구는 여전히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16강이란 꿈은 여전히 멀어 보였다.

아쉬운 실패: 1994년 미국 월드컵

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축구는 일본의 맹추격과 중동의 강세를 동시에 이겨내야 했다. 94년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동 국가를 상대로 고전한데다, 그동안 한 수 아래로 여기던 일본에마저 0-1로 패했다. 이로 인해 한국은 마지막 북한전에서 이겨도 일본이 이란을 이기면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는 벼랑 끝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가 북한을 이긴 반면, 일본은 이란에 경기 종료 직전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면서 순위가 뒤집힌다. 이른바 '도하의 기적'. 대한민국은 극적으로 3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당시 월드컵은 지금과는 달리 24팀이 6개 조로 조별 예선을 치렀다. 각 조의 2위까지 16강 진출이 확정되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 중 상위 4팀이 와일드카드로 16강 진출권을 받았다. 한국은 전 대회 우승국 독일, 무적함대 스페인, 남미의 다크호스 볼리비아와 한 조가 됐다. 현실적으로 독일전은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비교적 약체인 볼리비아를 잡는다면 다른 경기 결과에 따라 충분히 와일드카드로 16강에 갈 수 있었다. 

본선 첫 경기 스페인을 상대로 한국은 전반을 잘 버텼지만 후반 두 골을 내주며 0-2로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종료 5분을 남기고 홍명보가 만회골을 넣은 데 이어 경기 종료 직전, 서정원이 극적인 동점골까지 터뜨려 강호 스페인으로부터 승점 1점을 따냈다.

이제 볼리비아만 이기면 16강 가능성은 충분해진다. 16강이란 목표에 이렇게 가까워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은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골 결정력 부족으로 볼리비아전 0-0 무승부를 기록한다. 남은 상대는 당시 최강팀 중 하나인 독일. 사실상 16강은 불가능해졌다.

예상대로 한국은 독일을 상대로 전반에만 세 골을 내주며 무너진다. 그러나 한국은 후반 대반격에 나섰고 황선홍, 홍명보의 연속골이 터지며 2-3으로 따라잡았다. 후반 한 때는 오히려 독일을 밀어붙이는 모습에 우리가 세계 수준의 강호가 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결국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났고 대한민국은 전체 18위로 아쉽게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불가능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16강 진출에 가장 가까워졌던 대회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잊고 싶은 기억: 1998년 프랑스월드컵

차범근 당시 대표팀 감독 지휘 하에 한국은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무적으로 통했다. 축구대표팀 응원단 '붉은 악마'를 탄생시킨 계기이기도 했던, 그 유명한 '도쿄 대첩'을 탄생시키며 한국은 일찌감치 월드컵 진출권을 따냈다. 스트라이커 최용수는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리고 본선에서 한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멕시코와 한 조가 된다. 유럽에 유독 약했던 한국이었기에 멕시코를 반드시 잡아야 16강 진출 가능성이 있었다. 예선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 전반에 하석주의 프리킥이 수비수 맞고 굴절되며 멕시코 골망을 흔들었다. 월드컵 본선 사상 첫 선제골이었다.

붉은 악마는 환호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선제골을 넣은 하석주가 득점 한지 얼마 안 돼 거친 백태클로 즉시 퇴장 명령을 받았다. 대회를 앞두고 백태클에 대해 종전보다 엄격한 판정을 내리겠다는 FIFA의 정책에 첫 본보기가 된 셈이기도 했지만, 조심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적 열세 속에 전반은 잘 버텼지만, 결국 후반 들어 멕시코에 세 골을 내주며 어이없는 역전패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예선 2차전에선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를 맞아 0-5로 참패한다. 이로 인해 축구협회가 아시아 예선 당시 국민적 영웅의 위치까지 올랐던 차범근 감독을 대회 도중 경질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마지막 벨기에와의 3차전. 한국은 지휘관을 잃었고, 이전 경기에서 네덜란드와 멕시코에 비겼던 벨기에 역시 승리를 거둬야 16강 진출이 가능했기에 총력전으로 나올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

그러나 대표팀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0-1로 뒤지던 후반 유상철이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고 결국 한국은 승점 1점을 따낸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던 대회여서 실망도 컸다.

신화를 쓰다: 2002년 한일월드컵

홈에서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은 한국 축구가 처음으로 세계 축구 중심에 우뚝 섰던 대회였다. 그러나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야심 차게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 감독까지 영입했지만 프랑스와 체코에 연이어 0-5로 참패. 한 때 히딩크는 '오대영'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월드컵 역사상 최초 개최국 16강 진출 실패의 오명을 뒤집어 쓸 거란 비관적인 전망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히딩크는 월드컵 개막 한 달 전부터 한국을 완전히 다른 팀으로 변모시켰다. 당시 스스로 '체력은 좋지만 기술이 약하다.'라며 자평하던 한국 축구에게 히딩크는 '오히려 기술이 좋지만 체력이 약하다.'라고 역설하며 90분 내내 상대에게 강한 압박을 펼칠 수 있는 체력을 태극전사에게 심어줬다. 그리고 한국은 개막 한 달 전, 한국은 스코틀랜드를 4-1로 대파한데 이어 잉글랜드, 프랑스 등 우승후보들을 상대로 선전을 펼치며 1년 전과 전혀 다른 팀으로 변했다.



결국, 한국은 조별리그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유럽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인 끝에 2-0, 감격의 월드컵 본선 첫 승을 거둔다.

이후 미국과 1-1 무승부를 거두며 한국은 미국을 득실차로 제치고 조 1위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상대는 당시 세계 최고 선수였던 루이스 피구를 보유한 우승후보 포르투갈. 만약 우리가 패배하고 미국이 조 최약체로 전락한 폴란드와 최소한 비기면 또 다시 16강 진출에 실패한다.

한국과 포르투갈, 미국과 폴란드의 경기가 동시에 시작됐다. 숨을 죄어오는 긴장감이 흐르던 중 환호가 터진다. 폴란드가 미국을 상대로 선취골을 넣은 것. 이제 우리는 0-1로만 져도 16강에 갈 수 있다. 잠시 후, 폴란드가 또 골을 넣었다. 0-2로 져도 된다. 그런데 이럴 수가. 폴란드가 또 넣었다. 이젠 0-3으로 져도 16강에 갈 수 있다!

그런데 포르투갈이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후앙 핀투가 박지성에게 거친 태클을 걸며 퇴장을 당했고, 베투까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그리고 얼마 뒤, 박지성의 그림 같은 골이 포르투갈 골문을 열어 젖혔다. 믿을 수 없는 광경. 우리가 이겼다. 한국 축구가 세계 메이저 대회에서 유럽의 강호를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그 승리로 16강에 간다. 그것도 조 1위로.

시청 앞 광장의 '대~한 민국' 함성 앞엔 어느새 구호 하나가 더 붙어있었다. 바로 '세~계 최강.' 그날 밤만큼은 우리가 세계 최강이었고, 우승후보였다.

FIFA 랭킹 5위의 우승후보를 월드컵 본선에서 꺾은 한국은 더 이상 강팀이 두렵지 않았다. '폭주기관차'로 돌변한 대한민국은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고 사상 첫 아시아국가 월드컵 본선 4강 진출이란 신화를 일궈냈다. 만약 우리가 포르투갈에 졌지만 16강에 갔다면 아마도 2002년 6월이 그렇게 뜨거울 수 있었을 까란 생각도 든다.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다: 2006 독일 월드컵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사상 최초 월드컵 본선 1승은 물론 4강 진출이란 신화까지 일궈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쾌거였지만, 홈에서 거둔 성적이란 점에서 저평가 받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누구도 4년 전과 똑같은 성적이 독일에서도 재현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신화'는 신화일 뿐. 목표는 또 다시 16강이었다. 그러나 한 본 해본 16강이기에 언론과 팬들은 조금 다른 수식어를 붙었다. '원정 첫 16강.'

조 편성도 나쁘지 않아 보였고 출발도 4년 전과 비슷했다. 조 최약체로 꼽히던 토고에 2-1 역전승을 거뒀고, 최강 프랑스를 상대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마지막 스위스전에서 이기면 무조건 16강에 간다. 설사 0-0으로 비기더라도 프랑스가 토고에 1-0 승리를 거둔다면 16강 진출이 가능하다.

그러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제공권이 좋은 스위스를 상대로 세트 피스 상황에서 선제골을 내줬다. 그리고 프랑스가 토고에 2-0으로 앞서 있다. 토고의 무력한 플레이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제 무조건 이겨야 한다.

두 골이 필요한 상황에서 야속하게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반격을 계속하던 한국은 그러나, 오히려 스위스에 쐐기골을 얻어맞고 만다. 오프사이드 판정 논란이 있었지만 골은 이미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천수를 비롯한 선수들은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최선을 다했기에, 4년 전 비슷한 상황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경험이 있기에 더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2010년 남아공월드컵

이처럼 대표팀은 '월드컵 16강'이란 과제와 함께 한국 축구 영욕의 역사를 쌓아 올려왔다. 그리고 2010년, 한국 축구는 8번째 도전을 치르고 있다. 2경기를 치른 현재 1승 1패, 조 2위로 나이지리아와의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를 남겨두고 있다. 지면 무조건 탈락인 상황. 비겨도 가능성은 있지만 한국 축구는 승리를 원한다.

앞서 말했듯이 16강이란 목표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 '세계의 중심에 서는 한국 축구'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 당당하게 16강에 오를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한국 축구의 역사에 2010년 6월 남아공이 또 다른 좌절과 아픔이 아닌, 영광의 시절을 여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사진 = 박지성, 이영표 ⓒ Gettyimages/멀티비츠]



전성호 기자 press@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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