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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야구] 드림팀 1기를 돌아보다

기사입력 2007.08.09 00:19 / 기사수정 2007.08.09 00:19

박현철 기자

[엑스포츠뉴스=박현철 기자] 언젠가부터 프로선수들이 모인 야구대표팀에 '드림팀'이란 칭호가 사라졌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이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강 진출을 제외하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년이면 국제대회가 프로선수들에게도 문을 연 지 10년이 됩니다.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로 불렸던 박찬호(34. 현 휴스턴 산하 트리플 A)의 가세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던 98년. 당시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멤버들을 뒤돌아보고 그들의 현재를 알아보겠습니다.


박찬호의 합류, 김병현의 대두

98년 당시 다저스에서 15승을 거두고 대표팀의 합류한 박찬호의 존재감은 IMF 체제로 경제부문이 암울했던 시가와 맞물려 엄청난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프로무대에서 차출된 임창용, 김원형, 최원호 등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합류한 선수들이었지만 박찬호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요. 당시의 관심사는 조인성, 진갑용 등 대표팀 포수 진이 박찬호를 어떻게 아우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박찬호는 당시 아시안게임에서 일본과 대만을 상대로 2승을 거두며 한국의 금메달 획득에 큰 역할을 했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만약 금메달 획득 무산으로 병역 혜택을 받지 못했더라면 박찬호의 몸값은 많이 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2001년 메이저리그 정상급 마무리로 발돋움한 김병현은 4강전 상대였던 중국을 상대로 놀랄만한 피칭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8타자 연속 탈삼진을 일궈내는 등 6이닝 퍼펙트를 기록했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이후 김병현은 병역 혜택과 메이저리그 진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며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팔꿈치 수술 이전 강속구와 제구력을 겸비했던 서재응 또한 7.1이닝 동안 2개의 안타만을 내주며 2승을 거둬 좋은 모습을 보여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큽니다.

의외의 선수들

당시 홍성흔의 선발은 조금 의외였죠. 경희대의 4번 타자에 좋은 포수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지만 조인성, 진갑용의 좋은 포수 진에 아마추어 선수 안배차원에서 포수를 한 명 더 추가한 것이라는 인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성흔은 이듬해 두산 베어스에 입단해 99년 5월 단숨에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찼습니다. 좋은 활약으로 두산의 드림리그 1위를 이끌며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이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정도입니다.

홍성흔과 반대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고 있는 강봉규(사진)는 '대학 야구 최고의 3루수'로 각광받던 고려대 4번 타자 출신입니다. 그러나 두산 입단 후 김동주에 가려져 외야로 전향하는 등 빛을 보지 못했고 삼성으로 이적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대학 1학년생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강철민 또한 순천 효천고 시절부터 최고의 유망주였습니다. 그러나 프로 입단 후 허리 부상과 팔꿈치 부상으로 좋은 성적을 못 남겨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이 사라진 지 오랩니다. 항상 시즌 종료 후 마무리훈련에서 선발 내정자로 꼽혔음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부상이 웬수'죠.

대학 야구 최고의 에이스로 손꼽혔던 경헌호 또한 아쉽습니다. 경헌호는 한양대 시절이던 98년 춘계리그에서 직선타구에 눈을 맞아 실명위기에 놓였던 이후 구위가 뚝 떨어져 프로무대에서도 이름값을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야구 역대 최고 타자 중 한 명으로 꼽혔던 강혁이나 롯데 팬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었던 신명철의 경우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강혁은 아시안게임 이전의 병역 면탈 혐의로 뒤늦은 병역복무를 하는 등 질곡이 심했습니다.

주 감독의 아이들?

드림팀 1기 사령탑은 대학 야구 계의 명장 중 한 명이던 주성로 인하대 감독이었습니다. 당시 선수 명단에서 야구인들은 두 선수의 선발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었습니다. 바로 인하대 내야수 황우구와 좌타자 장영균입니다.

인하대를 거친 서재응의 경우는 워낙 뛰어난 선수라 야구인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선우(당시 보스턴), 최희섭(고려대) 등이 아닌 황우구와 장영균이 선발된 것에 야구인들은 '제자 아우르기가 아닌가?'라며 문제 삼았습니다.

황우구의 경우는 수비력 면에서 분명 프로급의 실력을 갖췄습니다. 그러나 타격이 약했고 장영균의 경우는 나름대로 좋은 방망이 실력을 갖췄으나 '드림팀'이라는 이름에는 조금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드림팀 1기에 이름을 올린 황우구와 장영균. 그러나 그들의 프로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한화 이글스에 2차 1순위로 입단한 황우구는 방망이가 문제가 되어 '타선의 구멍'이라는 오명을 쓰고 2004년 자진 은퇴의 길을 택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에 2차 3순위로 입단한 장영균이 삼성 유니폼을 입고 세운 기록은 2군 경기에서의 '사이클링 히트', 이것이 전부입니다. 장영균도 프로 무대를 밟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쓸쓸히 은퇴 절차를 밟았습니다.

세대교체와 좋은 성적, 두 마리 토끼 어떻게?

당시의 '드림팀 1기'는 프로무대에서 뛰는 젊은 주축 선수와 아마추어 선수들이 잘 조화가 된 팀이었습니다. 단순히 박찬호의 가세로 '드림팀'의 호칭이 붙은 것이 아니라 전도유망한 선수들로 조화롭게 선수단을 구성했기 때문에 '드림팀'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해 12월 야구대표팀은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3위에 그치며 참패를 당했습니다. 당시 사령탑이던 김재박 감독의 선수 선발은 전력 안정과 젊은 선수들의 병역 혜택을 동시에 꾀해야 했기에 그 와중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메달에 그친 이후 김재박 감독은 인터뷰에서 '베테랑 부족'과 '해외파 출전 거부'를 졸전의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코칭스태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주어진 재원으로 목표의식을 강하게 상기시키면서 경기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25인 엔트리'에 든 선수들의 국제경기 출장을 불허, 12월 대만에서 벌어질 2008' 베이징 올림픽 예선전에서 김병현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코리안리거 중 유일하게 제 몫을 하던 김병현의 결장은 뼈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해외파에 의존하며 '이제나저제나' 목을 쭉 빼고 기다리고 있다간 자양분과도 같은 국내 프로야구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언젠가 손을 대야 할 세대교체라는 과제를 미루다간 더 큰 참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젊은 선수들의 의욕을 고취시켜 실력 배양에 힘쓰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포지션에는 베테랑을 선발하는 등으로 세대교체와 목표의식 고취 등 당면한 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당장 성적에 초점을 모으기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대표팀을 기대합니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박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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