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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프랑스에 내린 선물 ' 월드컵 우승'

기사입력 2006.05.15 07:02 / 기사수정 2006.05.15 07:02

편집부 기자
    
1930년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태어난 월드컵은 70여 년의 세월을 쉼 없이 달려왔다. 그동안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 야신, 펠레, 베켄 바우어, 요한 크루이프, 마라도나 같이 전 세계를 뒤흔든 영웅들을 탄생시켰고, 종교와 이념의 대립 그리고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월드컵은 자유로웠다.

화산과 지진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도 월드컵을 향한 사람들의 집념과 열정을 가로막을 수 없었으며, 인종과 대륙을 초월한 전 세게 수십억의 사람들은 작은 공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달려왔다. 월드컵은, 그렇게 불가능하리라던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스포츠 그 이상의 스포츠였다.

◆제16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상)

▲개최 배경

▲ 프랑스 월드컵 포스터
ⓒ fifaworldcup.com
'20세기의 마지막 월드컵' 2년 뒤면, 21세기를 맞이하는 1998년의 월드컵 개최권은 많은 나라에 있어 욕심 나는 대회였다. 커져 가는 월드컵의 위상과 효과들은 차치하더라도, 20세기 인류가 탄생시킨 가장 뛰어난 창조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 월드컵의 마지막 개최는 분명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직전에 실시된 FIFA 총회는 20세기의 마지막 월드컵 개최국을 놓고 고심하였다. 많은 나라가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고 유치 경쟁에 들어갔지만, FIFA의 최종 선택을 고민케 한 두 나라는 1938년 3회 대회를 개최했던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모로코였다.

프랑스에 비해 전체적인 축구와 관련한 기반 시설이 부족했던 모로코의 경우, 비 유럽파들의 지지를 받으며 제3대륙의 월드컵 개최 바람을 타고 크게 부상했었다. 모로코는 제3세력에 균등한 기회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고, 프랑스는 유 개최 경험과 전체적인 축구 인프라에서 앞섰다.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월드컵 개최를 할 것이냐, 아니면 제3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역사가 있는 프랑스를 선택할 것이냐?

적지 않은 논쟁이 되었었던 1998년 월드컵 개최권은 FIFA가 '아직은 아프리카가 월드컵을 개최한다는 것은 무리다.'라는 최종 판결을 내림으로써, 프랑스에 60년 만에 영광스런 축제의 기회를 주었다. 이탈리아와 멕시코에 이은 세 번째 월드컵 2회 개최국이란 영광이 함께 따라온 터라 기쁨은 배가 되었다.

더군다나 '20세기의 마지막 월드컵 개최국'으로 남을 것이기에 프랑스 국민의 환호성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기존의 24개국이던 본선 참가국 수가 32개국으로 크게 늘어났고, 이에 따라오는 경기 수 증가와 TV 중계권 관광 산업 등 파급효과 또한 엄청나 프랑스로서는 그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 결승전에서 팀의 세 번째 골을 넣고 있는 프띠
ⓒ fifaworldcup.com

▲월드컵 뒷얘기

프랑스에 주어진 신의 선물 '우승'

프랑스는 일찌감치 인종을 가리지 않는 기화 정책을 써온 다민족 국가이다.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의 많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되었고, 프랑스의 이러한 개방적인 기화 정책은 축구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타인종의 축구 국가대표 선발'이란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이민 2세와 귀화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선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로 96부터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었던 에메 자케 감독은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들로부터 '프랑스 국가도 부를 줄 모르는 식민지 출신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라는 경고장을 받았지만, '검은색이든 흰색이든 축구만 잘하면 된다.'라고 일축해버렸다.

이런 프랑스의 귀화 정책은 결국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커다란 빛이 되어 돌아왔다. 프랑스는 지네디 지단(알제리) 마르셀 드사이(가나) 비에이라(세네갈) 같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었으며, 이는 차별을 넘어 모든 인종을 포용한 프랑스에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 불리게 되었다.

징크스, 징크스, 징크스..

지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켐페스가 6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의 살렌코(러시아)와 스토이치코프(불가리아)까지 모든 대회의 득점왕의 기록은 '6'이었다. 이 기록은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동유럽의 월드컵 열풍을 이어받은 크로아티아의 수케르도 '6'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20년간 이어져 온 '득점왕은 6골' 징크스의 재현이었던 것이다.

아주리 군단(이탈리아)은 유독 승부차기에 약하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어 이를 이탈리아의 '승부차기 징크스'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탈리아는 안방에서 열린 1990년 월드컵 준결승에서 알도 세레나의 실축으로 3-4로 무릎을 꿇었고,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에서는 에이스인 로베르토 바조의 실축으로 우승컵을 놓쳤다. 이 징크스는 프랑스 대회까지 이어졌는데, 8강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디 비아조가 실축해 역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우승국은 개최 대륙에서 나온다는 징크스도 재확인되었다. 지난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펠레의 활약을 앞세운 브라질이 우승컵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우승하면서 스웨덴 월드컵을 제외한 15번의 대회에서는 모두 개최 대륙에서 우승국이 나왔다.

▲ 16강에서 다시 만난 숙명의 라이벌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 fifaworldcup.com

진화하는 축구 규칙

FIFA는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특별 조치를 발동했다. 바로 '백태클'에 대한 처벌 강화였다. 이는 1980년 이후 계속 하락하고 있는 골의 증가와 좀 더 재미있는 축구, 공격적인 축구를 꿈꾸던 FIFA가 내놓던 극약 처방이었다. 이로 인해 적극적이고 강한 압박의 수비 축구가 주춤하기도 했는데,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전 대회보다 무려 7명이 많은 22명의 퇴장 선수가 나오기도 했다.

1962년 월드컵에서 펠레로 인해 선수 교체와 경고 퇴장 카드가 만들어진 이래 FIFA의 규칙은 더 재미있는 축구를 위해 계속 발전하고 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골키퍼 백패스 금지와 시간 지연 경고 조치가 강화되었으며,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백태클에 대한 처벌이 크게 강화되었다. 또,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이른바 '시뮬레이션 액션'에 대한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었다.

▲대회 기록

*대회기간 : 1998.6.10 - 1998.7.12(33일간)
*참 가 국 :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벨기에, 브라질, 불가리아, 카메룬, 칠레, 콜롬비아, 크로아티아, 덴마르크,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이란, 이탈리아, 자메이카, 일본, 멕시코, 모로코, 네덜란드, 나이지리아, 노르웨이, 파라과이, 루마니아, 사우디 아라비아, 스코틀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한민국, 스페인, 튀니지, 미국, 유고슬라비아(32개국)
*개최도시 : 파리, 생드니, 리옹 등 10개 도시
*총 득 점 : 64경기 171골, 평균 득점 2.67골
*총 관 중 : 2,775,400명, 평균 광중 43,366명
*득 점 왕 : 다보르 수케르(6골·크로아티아)
*결 승 전 : 프랑스 vs 브라질 ( 3 : 0 )
참가국 수를 늘리면서 더 많은 나라에 '월드컵의 꿈'을 나누어 주고 싶다는 FIFA의 판단은 옳았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작고 약한 나라들은 경제 논리에 의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지만, FIFA의 이러한 결정으로 더 많은 약소국이 '월드컵'이라는 새로운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인류의 마지막 월드컵인 프랑스 대회에서는 호나우두(브라질)나 앙리(프랑스) 오웬(잉글랜드) 같은 샛별들을 배출해 냈고, 월드컵 결승에서는 프랑스가 브라질을 3-0으로 제압하면서 '영원한 강자도 약자도 없다.'라는 스포츠 세계의 진리도 다시금 일깨워 준 대회였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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