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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0‘s] 얄미웠던 亞스타, 지금 어떻게 지내나

기사입력 2012.09.11 11:38 / 기사수정 2012.09.11 15:48

서영원 기자


[엑스포츠뉴스=서영원 기자] 최근 90년대 추억을 매개로 한 드라마가 선풍적 인기다. 이 드라마를 보며 아련했던 추억을 회상하는 이들이 많다. 우연의 일치겠으나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물결 무늬의 대표팀 유니폼과 함께 축구 인기가 절정이었던 시기와 동일하다.

지금은 '올드팬'이 된 1세대 축구팬들은 아시안컵, 월드컵예선을 통해 이웃나라 축구를 접했다. 이들은 PC 통신으로 정보를 공유했고 당시 A매치가 열렸던 잠실종합운동장으로 집결했다. 지금은 가가와 신지, 세르베르 제파로프로 대변되는 아시아의 얄미운(?) 축구스타들이 그 시절에도 존재했다.

미우라 가즈요시, 나카타 히데토시, 알리 다에이 등 그때 그 시절의 아시아 스타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카타 히데토시 l 일본 l 프로통산 377경기 52골 l A매치 77경기 11골

나카타 히데토시는 일본의 미래를 짊어질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7년 한국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하며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전방의 침투패스와 중장거리 크로스에 모두 능숙했다.

일본 대표팀에서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이란과의 플레이오프에서 3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괴력을 선보였다. 이 경기에서 3-2로 승리한 일본은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달성했다.

하지만 기량에 비해 적지않은 비판도 감수해야 했다. 국가 제창 때 ‘기미가요’를 거부한 일화는 유명한데 나카타는 “축구를 하기 전 기분 나쁜 노래는 부르지 않겠다”라로 말해 일본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기도 했다.

2006 독일월드컵이 끝난 뒤 "축구에 흥미를 잃었다"라며 돌연 은퇴한 나카타는 축구와 자선사업을 넘나들며 폭넓게 활동 중이다. 고향팀 벨마레 히라스카가 자금난에 시달릴 때에는 자신의 홈페이지(nakata.net)를 클럽 스폰서에 포함하는 개념으로 팀을 도왔다. 디자인 공부를 병행하며 벨마레의 유니폼을 제작하기도 했다.

봉사활동을 통해 전 세계 인맥을 쌓은 나카타는 티베트 승려 축구팀의 축구코치, 필리핀 빈민지원 프로그램 팀장을 맡고 있다. 과자회사의 브랜딩 책임자, 기획사의 대주주도 병행하며 축구 외적으로도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선 언어학습이 필요하다며 이탈리아, 영어,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다.

호다다드 아지지 l 이란 l A매치 47경기 11골

호다다드 아지지는 1989년부터 2006년까지 오랜 선수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란 프로리그의 기록 부재로 정확한 데이터를 찾기는 어렵다. A매치 역시 이란 정권과 갈등을 빚으며 많은 경기를 뛰지는 못했다.

국내팬에게 인상이 남아있는 장면은 1996 아시안컵 8강전이다. 당시 2-0으로 끌려가던 이란은 알리 다에이, 카림 바게리와 함께 6골을 몰아치는 폭발력을 드러내며 한국에 역전승을 거뒀다. 

아시안컵 MVP로 선정된 아지지는 이후 독일 분데스리가, 미국 프로축구 등에서 활약하다 이란으로 복귀한 뒤 선수생활을 접었다. 평소 거침없는 언행과 정치적 발언으로 구설수에 자주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하세미안, 카리미, 마다비키아 등 수많은 대표팀 후배들이 아지지를 따르고 있다.

은퇴 후 고향팀 FC아부모슬렘의 고문 겸 코치로 지내다 지난 6월 사임 했다. 평소 시민 계몽에 큰 관심을 보인 그는 교육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사드 알 오와이란 l 사우디아라비아 l A매치 50경기 24골

알 오와이란은 로베르토 바지오, 게오르게 하지가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1994 미국월드컵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측면 미드필더로 활약한 그는 조별리그에서 상대한 벨기에, 네덜란드, 모로코전에서 현란한 드리블을 선보이며 상대를 흔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끈 그는 당시 22명의 올스타 가운데 유일한 아시아 선수로 선정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중동의 마라도나’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알 오와이란은 데뷔부터 은퇴까지 자국리그인 알샤바브에서 뛰었다.

해외팀 이적 제의가 끊이지 않았지만 해외진출을 불허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규정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시안클럽챔피언십(현 AFC챔피언스리그)을 뛴 것이 프로선수로 가장 굵직한 대회에 나선 셈이다. 대표팀에서는 아시안컵, 월드컵, 컨페더레이션스컵 등 주로 메이저대회에만 참가해 A매치 경기수가 많지는 않다.

2001년 은퇴한 알 오와이란은 알샤바브의 유소년 코치로 재직 중이다. 언론 노출을 워낙 꺼리는데다 사우디아라비아 축구협회의 보호에 의해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샤츠키흐 형제 l 우즈베키스탄 l A매치 올레그: 11경기 3골, 막심: 61경기 34골

샤츠키흐 형제는 아흐메도프, 게인리히, 제파로프가 각광 받기 전 우즈베키스탄 축구선수 중 가장 유명한 선수들이었다. 형 올레그 샤츠키흐는 1998 프랑스월드컵 예선에서 한국을 상대로 골을 넣었다. 동생 막심 샤츠키흐도 아시아 무대에서 수없이 한국을 괴롭힌 선수 중 하나였다.

올레그는 체력과 잦은 부상으로 2001년 은퇴 뒤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심은 우크라이나의 명문 클럽 디나모 키예프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지금은 아스날 키예프에서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막심은 우즈베키스탄의 셰브첸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1999년 셰브첸코를 AC밀란으로 떠나 보낸 디나모 키예프의 선택이 막심이었다. 그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해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골을 넣는 등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우즈베키스탄 대표팀에서는 2011아시안컵 3,4위전 출전 후 은퇴했다. 같은 날 대표팀 은퇴를 공식화한 이영표, 박지성에 밀려 해외언론의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그 외 선수들 지금 어떻게 지내나

90년대 일본축구를 이끌던 나나미 히로시, 기타자와 츠요시, 조 쇼지는 각각 J리그 고문과 해설자로 활동 중이다. 스트라이커 미우라 다이스케는 여전히 현역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 11번째 스트라이커'에 목소리 출연하며 스타성을 입증했다.

중국의 하오하이동은 중국프로축구 텐진 테다의 임원으로 활동 중이다. 프리미어리그에 잠시 진출했던 리티에는 광저우 헝다의 마르셀로 리피 감독의 요청으로 코치로 부임했다.

이밖에 2000 아시안컵에서 한국을 침몰시킨 쿠웨이트의 바사르 압둘라는 쿠웨이트 17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의 코치로 재직 중이다. A매치와 클럽대항전서 한국을 괴롭히던 사우디 알 자베르는 프로팀 알 히랄의 코치로 활동하다 감독대행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서영원 기자 schneider19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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