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가려진 시간' 포스터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번 보면 오래 남는 숨은 명작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유'는 나만 알기 아쉬운 콘텐츠를 찾아 이 콘텐츠를 봐야 이유를 짚어드립니다. [편집자주]
(엑스포츠뉴스 이유림 기자) 흥행 성적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기에는 아까운 영화가 있다.
2016년 개봉한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은 당시 51만여 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여다봐도 독특한 소재와 섬세한 연출, 아름다운 영상미가 선명하게 남는 작품이다.
'가려진 시간'은 어린이 집단 실종 사건 이후 홀로 어른이 되어 돌아온 성민(강동원 분)과 그를 유일하게 믿어주는 소녀 수린(신은수)의 이야기를 그린 감성 판타지다.
아이였던 성민(이효제)이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로 들어선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자칫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설정을 영화가 꽤나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는 점이다.
'가려진 시간'으로 상업영화에 데뷔한 엄태화 감독은 모호하고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서둘러 해답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대신 인물의 감정과 이미지, 분위기를 차곡차곡 쌓으며 관객이 성민과 수린의 세계를 직접 따라가도록 만든다.
특히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멈춘 세계'를 구현한 방식이다. 성민과 아이들에게만 시간이 흐르고, 그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버린다는 설정은 영화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영화 '가려진 시간' 예고편
영화는 단순히 사람의 움직임만 멈춰 세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파도와 연기처럼 본래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을 한순간에 정지시키고,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이나 뛰어오르는 고양이까지 그대로 붙잡아둔다.
움직여야 할 것들이 움직이지 않는 장면은 낯설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시간이 멈춘다'는 판타지적 설정을 관객이 눈으로 체감하게 한다.
특히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아이들의 시간이 흘러 어느새 몸만 자라버린 모습과 그 안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기묘한 정서를 잘 드러낸다.
판타지라는 장르적 설정을 단순한 볼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시간과 성장이라는 소재를 이미지로 풀어낸 셈이다. 시각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음향과 효과 역시 멈춰버린 세계의 이질감을 강조했다.

영화 '가려진 시간' 스틸컷
강동원의 변신 역시 이 작품을 다시 볼 만한 이유 중 하나다.
당시 강동원은 '검은 사제들'과 '검사외전'으로 연이어 흥행을 거둔 뒤 '가려진 시간'을 통해 감성 판타지 장르에 도전했다. 익숙한 이미지에 기대기보다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을 꺼내든 선택이었다.
영화 중반부 이후 모습을 드러내는 성민은 외형만 놓고 보면 어른이지만, 말투와 눈빛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남아 있다. 강동원은 겁을 먹은 듯하면서도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캐릭터에 설득력을 더했다.
강동원 역시 당시 성민을 두고 "그간 맡았던 역할 중 가장 순수한 배역"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소년인 듯, 성인인 듯한 캐릭터의 적정선을 찾는 게 고민이었다"며 "캐릭터 특성상 관객들에게 의심과 믿음을 동시에 줘야 하는 점도 어려웠다"고 밝힌 바 있다. 어린아이 같은 눈빛과 말투에 신경을 썼다는 그의 설명처럼 성민은 강동원의 기존 필모그래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결의 인물이다.
그가 비슷한 역할을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캐릭터와 장르에 도전하는 것을 배우로서의 재미로 꼽았다는 점에서도 '가려진 시간'은 의미가 있다. 흥행작 이후 안정적인 선택을 하기보다 자신에게 낯선 역할을 택했고, 그 선택을 통해 배우 강동원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 '가려진 시간' 스틸컷
신은수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수린은 성민의 말을 믿어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민의 이야기를 믿어달라고 호소하는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성민을 바라보는 수린의 감정은 신은수의 깊은 눈빛을 통해 표현된다.
성민을 향한 의심과 믿음, 어른들의 시선과 그에 맞서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부딪히면서 영화는 단순한 판타지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말로 설명하기보다 인물의 표정과 시선, 정적인 장면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 작품 특유의 여운을 만든다.
이 같은 작품성은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가려진 시간'은 제54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과 음악상을 비롯해 제12회 파리한국영화제 관객상, 제6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특별상 등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극장을 찾은 관객은 51만여 명에 머물렀다.

영화 '가려진 시간' 스틸컷
흥행 성적은 아쉬웠지만 영화가 가진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요소들이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보인다. 강동원의 새로운 얼굴과 엄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 그리고 '시간이 멈춘다'는 추상적인 개념을 눈앞의 이미지로 만들어낸 영상미는 지금 봐도 이 영화만의 분명한 개성으로 남아 있다.
강동원 역시 당시 영화 '마스터' 관련 인터뷰에서 "많은 분들이 극장에서 못 봤지만 TV로라도 보셨으면 좋겠다. 2시간 투자하셔도 충분히 괜찮은 영화"라고 말하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흥행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더 많은 관객이 영화를 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
51만 관객이라는 숫자만으로 기억하기엔 아쉬운 영화다. 엄태화 감독의 독특한 세계관, 강동원의 새로운 얼굴, 시간이 멈춘 세계의 이미지까지. 흥행에 가려졌던 '가려진 시간'의 진가를 다시 확인해볼 만하다.
사진=쇼박스
이유림 기자 reason17@xports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