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사는 고시원에서 수도요금이 무려 120만원 나왔다. 돈의 행방을 쫓는 생활 코미디처럼 시작하지만, 엄마가 하나씩 단서를 좇을수록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범죄 스릴러로 변한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범죄의 여왕'은 극장에서는 약 4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지만, 네이버 영화 관람객 평점 8.41점, 네티즌 평점 8.63점을 기록하며 시간이 흐른 뒤 "왜 당시에는 더 주목받지 못했을까"라는 재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수도요금 120만원에서 시작된 생활밀착형 스릴러
이요섭 감독의 '범죄의 여왕'은 평범한 일상에서 범죄의 단서를 끌어내는 생활밀착형 스릴러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엄마 미경은 아들의 고시원에서 청구된 거액의 수도요금을 확인한 뒤 직접 원인을 찾기 위해 나선다.
영화 '범죄의 여왕' 포스터
박지영이 연기한 미경은 형사도 탐정도 아니다. 하지만 수상한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직감과 특유의 생활력이 있다. 관리사무소를 찾아가 따지고, 입주자들을 직접 만나며 누구보다 빠르게 사건의 중심으로 파고든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물러서지 않는 평범한 엄마를 범죄물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설정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박지영은 현실적인 모성과 능청스러운 유머, 위기 앞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강단을 오가며 극 전체를 이끈다.
웃기다가 어느 순간 서늘해진다
영화는 수도요금을 둘러싼 소동으로 가볍게 출발한다. 하지만 미경이 고시원의 비밀에 가까워질수록 분위기는 빠르게 달라진다. 생활 코미디였던 이야기는 어느새 미스터리와 범죄 스릴러의 긴장감으로 이어진다.
영화 '범죄의 여왕' 덕구 역의 배우 백수장
좁은 고시원이라는 공간도 작품의 매력을 키운다. 시험에 거듭 낙방한 고시생, 게임에 빠져 사는 입주자 등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인물들이 사건과 얽히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미경을 돕는 관리사무소 직원 개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최근 SBS 드라마 '김부장'에서 조직폭력배 금이빨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조복래는 이 작품에서는 투박하지만 정 많은 청년 개태를 연기한다. 무심한 듯 미경을 돕는 그의 모습은 위협적인 악역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영화 '범죄의 여왕' 스틸컷 조복래, 박지영
해외에서 먼저 가능성을 알아본 영화
'범죄의 여왕'은 '1999, 면회', '족구왕' 등을 만든 영화창작집단 광화문시네마의 세 번째 장편이다. 스타 캐스팅보다 아이디어와 캐릭터의 힘으로 승부한 작품에 가깝다.
국내 개봉에 앞서 일본과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6개 지역에 선판매되기도 했다. 평범한 엄마가 고시원의 수상한 사건을 파헤친다는 독특한 설정이 해외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영화 '범죄의 여왕' 언론시사회
평점은 8.41점…시간이 지나 더 많이 이야기된 영화
제공된 자료 기준 극장 누적 관객은 4만여 명, 관람객 평점은 8.41점이다. 흥행 규모와 실제 관객 만족도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격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작품을 뒤늦게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왜 이런 영화가 당시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을까"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온라인 리뷰와 영화 커뮤니티에는 "엄마를 탐정처럼 내세운 설정이 신선하다", "웃다가도 어느 순간 긴장감이 확 살아난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밀도 있는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캐릭터와 공간이 모두 살아 있는 웰메이드 스릴러"라는 평가가 꾸준히 올라왔다.
일부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흥행 실패"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뒤늦은 재평가가 이어졌다.
개봉 당시에는 대형 상업영화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이야기와 캐릭터 중심의 영화인 데다 블랙코미디와 미스터리, 가족 드라마를 넘나드는 독특한 색깔도 한두 문장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이런 개성이 입소문을 탔고, 지금은 '숨겨진 한국 스릴러'로 추천하는 관객들도 적지 않다.
영화 '범죄의 여왕' 개태 역의 조복래
극장에서는 놓쳤지만, OTT에서는 다시 발견됐다
이 같은 재평가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이어졌다. 극장에서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작품이 OTT에서는 부담 없이 시작했다가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로 입소문을 탔다.
실제로 '범죄의 여왕'은 올해 3월 넷플릭스 '오늘 대한민국의 TOP 10 영화'에서 한때 7위에 오르기도 했다. 7월 현재 순위권에 머물고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개봉 후 약 10년이 지나 새로운 관객들과 만나 다시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있다.
화려한 액션도, 거대한 사건도 없다. 대신 엄마의 생활력과 직감, 그리고 일상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긴장감으로 끝까지 관객을 끌고 간다.
극장에서는 4만여 명만 선택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꺼내 보는 사람들이 "왜 이 영화를 이제야 봤을까"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