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액션보다 사람 냄새나는 누아르를 찾는다면 '뜨거운 피'는 다시 꺼내 볼 만한 작품이다. 극장 개봉 당시에는 누적 관객 37만7469명을 기록하며 큰 흥행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정우를 비롯한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와 현실적인 누아르로 재평가받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건달이 된 사람들의 현실 누아르
'뜨거운 피'는 1993년 부산 변두리 포구 '구암'을 배경으로 한다. 더 나쁜 놈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조직의 실세 희수와 밑바닥 건달들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치열한 싸움을 그린 작품이다.
화려한 조직의 세계를 그리는 기존 조폭 영화와 달리 먹고살기 위해 건달이 된 사람들의 현실을 정면으로 비춘다.
원작은 김언수 작가가 2016년 출간한 동명 장편소설이다. 여기에 소설 '고래'로 등단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천명관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아 첫 장편 영화에 도전했다.
천 감독은 방대한 원작을 두 시간 안에 압축하면서도 인간의 욕망과 배신, 생존이라는 핵심 정서를 영화만의 리듬으로 풀어냈다.
영화 '뜨거운 피' 스틸컷. 김무성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가 만든 몰입감
영화의 중심에는 정우가 연기한 희수가 있다. 구암의 실세이자 만리장 호텔 사장 손영감(김갑수)의 오른팔이지만, 마흔이 되면서 평범한 삶을 꿈꾸기 시작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권력 다툼과 배신이 이어지면서 그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앞에 놓인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한 남자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차근차근 따라간다.
정우는 개봉 당시 "'뜨거운 피'는 MSG가 들어가지 않은 정통 누아르"라고 소개했다. 캐릭터를 위해 촬영 기간 내내 체중을 줄이고, 충혈된 눈과 수척한 얼굴을 유지하며 희수의 피폐한 삶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천명관 감독 역시 "정우의 인생 연기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영화 '뜨거운 피' 아미 역의 이홍내
배우들의 연기는 이 작품이 지금도 추천되는 가장 큰 이유다. 김갑수는 구암을 장악한 손영감을 묵직하게 그려냈고, 최무성은 해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용강으로 긴장감을 더한다. 지승현은 조직의 균형을 흔드는 철진을 연기하며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특히 최근 넷플릭스 화제작 '동궁'에서 무당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이홍내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혈기왕성한 새끼 건달 '아미' 역을 맡은 그는 길지 않은 분량에도 강렬한 눈빛과 거친 에너지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희수와 부자 같은 관계를 형성하며 영화의 감정선을 완성했고, 이 작품으로 제5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며 차세대 배우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영화 '뜨거운 피' 스틸컷
생활감 있는 의상, 오래 남는 대사
'뜨거운 피'가 기존 누아르와 다른 이유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있다. 천명관 감독은 "구암 같은 변두리 건달들은 양복보다 생활감 있는 옷을 입었을 것"이라며 화려한 스타일 대신 현실적인 의상을 선택했다.
희수의 낡은 점퍼와 생활복, 손영감의 골프웨어, 용강의 이국적인 스타일, 아미의 스포츠 브랜드 의상까지 캐릭터마다 다른 디테일을 더해 1990년대 부산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살렸다.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대사다. 소설가 출신 감독답게 인물들의 욕망과 생존을 함축한 문장들이 긴 여운을 남긴다. 특히 "자신을 증오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두 가지 길 중 하나에 닿게 된다.
밑바닥으로 처박히는가, 왕이 되는가."라는 문장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화려한 액션보다 사람과 욕망을 들여다보는 '뜨거운 피'의 분위기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영화 '뜨거운 피' 스틸컷
주말 2시간,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는 영화
개봉 당시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렸다. 전개가 익숙한 한국형 누아르의 문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부산 사투리를 제대로 사용하는 정우의 열연과 다양한 인물들의 현실감 넘치는 연기가 다소 예측 가능한 전개를 끝까지 끌고 간 가장 큰 힘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네이버 관람객 평점은 7.81점, 롯데시네마 평점은 7.8점, 메가박스 평점은 7.5점을 기록하는 등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다.
영화 '뜨거운 피' 언혼시사회에 참석한 지승현, 정우, 천명관 감독, 이홍내
'뜨거운 피'는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했지만 최종 누적 관객 수는 37만7469명을 기록했다. 흥행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배우들의 연기와 원작이 가진 묵직한 이야기, 그리고 기존 누아르와는 다른 현실적인 분위기로 재평가받고 있다.
화려한 액션과 통쾌한 복수극을 기대한다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조직보다 사람을, 의리보다 생존을 이야기하는 한국 누아르 영화를 찾는다면 '뜨거운 피'는 주말 2시간을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