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최종편집일 2024-05-1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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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아메리까노(3)] '보카'이야기: 축구, 탕고…사라진 흑인들

기사입력 2010.09.10 17:20 / 기사수정 2010.09.10 17:20

윤인섭 기자
 

편집자주: 엑스포츠뉴스는 매주 금요일마다 남미 축구 전문 기자 윤인섭 기자의 '풋볼 아메리까노'를 연재합니다. '아메리카'는 많은 경우 미국을 지칭하지만 남미에서 말하는 '아메리까'는 많은 경우 미국을 제외한 범 라틴 아메리카를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풋볼 아메리까노를 통해 매주 살아있는 남미 축구에 대한 다양한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엑스포츠뉴스=윤인섭 기자] ‘보카(Boca)’는 스페인어로 입을 뜻한다. 그것은 이탈리어어(Bocca)로도 발음이 마찬가지다.

이런 연유에서 우리가 잘 아는 ‘보카 후니오르스’라는 클럽이 탄생했다. 보카 후니오르스의 연고지, 보카 지구 역시 오랜 기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입구(入口)’ 역할을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카 후니오르스를 창설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보카 지구’야 말로 현재 아르헨티나 인구 최대 비율을 차지하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아르헨티나 이민이 시작된 공간이다. 
 
이 모든 것은 보카가 항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비록,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푸에르토 마데로’나 도시 북쪽의 새로운 항구 지대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축 항구 역할을 빼앗겼지만 보카는 아르헨티나 수도 최초의 항구였다. 그리고 16세기 중반부터 대형 철선이 활기 치던 19세기 후반까지, 보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요한 항구로서 그 역할에 변함이 없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남대서양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스페인 왕실의 항구였고 18세기에는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이 남미 대륙으로 들어오는 창구 구실을 함으로 ‘독립의 19세기’가 싹트던 공간이 바로 보카 항구였다.
 
또한, 아르헨티나 독립 후에는 유럽에서의 대량 이민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아르헨티나의 관문 역할을 소화했다. 그 밖에 근대의 수많은 발명품이 이민자의 물결과 함께 보카 항을 통해 아르헨티나 각지로 전파되며 아르헨티나에 ‘근대’라는 ‘대변혁’의 시대를 개막했다.
 
그러나 ‘근대’라는 시대적 흐름이 반드시 한 문화의 요소에 풍성함만 안겨 주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회에 유입된 새로운 양식이 있다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도태’라는 현상도 있을 것이고 그 사회의 토종과 결합한 ‘혼종’이라는 현상도 발생할 것이다. 
 
아르헨티나를 예를 들자면, 유럽의 이민들을 뒤따라 지금의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축구’라는 문화가 들어왔고 본래 보카 지구의 주요 거주자이던 흑인들은 유럽의 이민자들에 밀려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그리고 사라진 아르헨티나 흑인들의 리듬은 유럽의 다양한 음악과 섞여 ‘탕고(Tango)’라는 아르헨티나 특유의 음악적 양식으로 거듭난다.  
 
앞으로 이 글에서는 지금의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축구’, ‘탕고’, ‘백인국가’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해 다루겠다. 물론, 주인공은 ‘보카’이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보카 후니오르스’가 조연일 뿐이다.
 
1. 보카: 아르헨티나에 ‘축구시대’를 열다. 
 
보카 지구에는 ‘보카 후니오르스’라는 축구팀이 있다. 도시 북부의 부촌에 자리 잡은 리베르플라테와 아르헨티나 축구를 양분하는 클럽이다. 국내리그 우승횟수(29회, 아마시절 통합)에서는 리베르(34회)에 다소 밀리지만 각종 국제대회에서 18회 우승을 기록, 이탈리아 명문 AC 밀란과 이 부분 세계 공동 1위를 기록 중이다. 또한, 아르헨티나 인의 40%가 지지하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인기 축구 클럽이다.
 
보카라는 항구 지구에 축구팀이 생긴 것은 1905년이다. 이탈리아 이민자이던 에스테반 비글리에토, 알프레도 스카르타피, 산티아고 페드로 사나, 그리고 후안과 테오도르 파렝가 형제, 이들 다섯 젊은이의 모임이 훗날 아르헨티나 최고의 축구 클럽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보카’가 상징하는 가난한 동네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클럽 이름 뒤에 ‘주니어스(Juniors)’라는 영어식 명칭을 덧붙였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란 영국계 이민자들을 비롯한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0년대 들어 아르헨티나 축구는 영국계 시민과 부유층의 전유물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1912년에는 축구 협회의 명칭을 영어식 표기 ‘Argentine Football Association’에서 ‘Asociación Argentina de Football’로 변경했고 1915년 시작된 단일리그에서 보카와 이웃한 아베샤네다의 ‘라싱 클럽’이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아르헨티나 축구에서 영국계 클럽의 헤게모니를 종식했다.
 
보카 후니오르스 역시, 창립 14년 만인 1919년, 아르헨티나 전국 리그를 제패하며 아르헨티나 축구의 강자로 떠오른다. 비록, 이 해를 기점으로 아르헨티나 축구리그가 양대 리그(아르헨티나 축구협회와 아마추어 축구협회)로 분열됐지만, 보카 후니오르스는 이후 4차례를 더 우승하며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최강 클럽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1925년, 보카 후니오르스의 명성은 아르헨티나를 넘어 유럽에까지 이른다. 그 해, 국내리그를 불참하면서까지 유럽 원정길에 나선 보카 후니오르스는 스페인, 독일, 프랑스를 돌며 각국의 명문팀과 자웅을 겨뤘다. 보카 후니오르스는 19경기를 치렀고 15승1무3패의 성적으로 유럽 팀들을 압도했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AT 데 마드리드 역시 당시 보카 후니오르스에 패배한 팀 중 하나이다.
 
이러한 성과로 보카 후니오르스는 1925년,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에 의해 올해의 팀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보카 후니오르스의 유럽 원정은 1924년 우루과이의 파리 올림픽 우승과 함께, 축구가 더는 유럽의 전유물이 아님을 유럽인들에게 뼈저리게 인식하게끔 한 결과였다.
 
아르헨티나에서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유럽 원정을 통해 결성된 ‘라 도세(12)’라는 단체는 아르헨티나 축구 최초의 ‘서포터스’ 모임으로 자리하며 원정 이후 아르헨티나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성장을 이뤄냈고 보카 후니오르스는 그야말로 ‘가난한 자’를 대표하는 아르헨티나 전국구 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후, 1931년 개막한 아르헨티나 프로리그에서 보카 후니오르스는 당당히 우승을 차지, 아르헨티나를 제패한 최초의 프로팀으로 역사에 남았다. 원년 우승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프로리그를 23회 우승한 보카 후니오르스는 디에고 마라도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후안 로만 리켈메 등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다수를 배출하며 아르헨티나 축구의 세계 강호 도약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남미의 챔피언스리그) 6회 우승, 클럽 월드컵 3회 우승 등, 국제대회에서의 빛나는 성과로 세계적인 명성의 클럽으로 발돋움했다. 
 
2. 보카의 또 다른 상징 ‘탕고’
 
‘땅고’, ‘탕고’, ‘탱고’.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음악과 그 춤사위에 붙여진 한글 표기법 세 가지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표기법은 ‘탱고’이고 가장 현지발음에 정확한 표기는 ‘땅고’이다. ‘탕고’는 된소리 발음을 가급적 억제하는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으로 말미암아 된소리를 거센소리로 전환한 표기법이다.
 
그런데 왜 ‘탱고’라는 표기법이 가장 널리 쓰이는가? 한국이라는 공간이 처해있는 영어식 발음의 엄청난 위력 앞에 현지 발음의 권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그러나 필자가 만난 영어권 사람 누구도 ‘탱고’라고 발음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필자가 영어권 국가에 체류한 기간이 얼마 안 돼서일 수도 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영미권 사람들은 안 되는 발음으로 ‘땅고’를 ‘탕고우’라 발음하곤 했다.
 
이거야말로 콩글리시의 반대 현상이 아닐까? 그러나 그 기원이 애매모호해진 상황은 아르헨티나의 음악, ‘탕고’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땅고’라는 발음이 ‘탱고’로 변형된 것처럼, ‘탕고’라는 음악 역시 원래의 것이 이리저리 뒤섞이며 새로운 형태로 자리한 것이다. 그것을 계보화시키면 ‘칸돔베’라는 음악과 ‘하바네라’가 만나 ‘밀롱가’를 낳고, 밀롱가가 유럽의 음악 스타일과 만나 ‘탕고’를 낳고 아르헨티나에 인접한 우루과이에 ‘탕고’의 또 다른 갈래, ‘탕고 우루과쇼’를 낳는 것이다.
 
칸돔베는 아르헨티나 흑인 노예들의 리듬이 스페인의 음악과 합쳐져 탄생한 스타일이고 하바네라는 쿠바의 흑인 음악으로 19세기 중반, 선원들에 의해 아르헨티나에 전파됐다. 이 둘이 만나 밀롱가라는 적자를 낳았고, 19세기 후반의 엄청난 이민 열풍 속에서, 밀롱가는 유럽 각지의 음악과 교접하며 ‘탕고’를 출현시킨다. 즉, ‘탕고’라는 음악 자체가 스페인과 아프리카, 쿠바, 거기에 이민자들이 몰고 온 각지의 유럽 음악과 만난 다양한 혼합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혼종성’이야 말로 지금의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용어일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이야말로 스페인이라는 ‘부계’에 토착 아메리카라는 ‘모계’, 거기에 아프리카의 노예와 유럽 각지에서의 이민으로 이뤄진 복잡한 경로를 거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주지해야 할 것은 바로 항구의 중요성이다. 아직 비행기가 없는 시절이기 때문에 이 모든 재료가 만나려면 항구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르헨티나의 ‘탕고’에 대한 것이라면 그 접점이 되는 공간은 바로 보카 항이다. (우루과이는 몬테비데오)
 
보카 지구야말로 아르헨티나 흑인들의 본거지였고 쿠바의 하바네라가 아르헨티나로 유입된 장소이다. 여기에 유럽에서 엄청난 인파가 입항하며 그중에서 카를로스 가르델(우루과이 출신이라는 설도 있음), 아스토르 피아소샤(이태리 식으로는 피아졸라) 같은 천재 작곡가들이 출현, 이 모든 것을 집대성해 ‘탕고’란 음악의 장을 연 것이다.
 
지금도 악천후가 없는 날이라면, 보카 지구 거리 곳곳에서 ‘탕고’ 춤을 추는 한 쌍의 무희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탕고’의 중심이 더욱 도시 중앙에 가까운 ‘산텔모’ 지구로 옮겨갔지만, 보카에서도 충분히 영화 ‘해피투게더’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3. 보카의 슬픈 역사: 사라진 흑인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남미의 유럽’이라 불린다. 다른 대다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인구에서 차지하는 백인의 비율(90%, 미국은 70%)이 다른 인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인구 구성에는 커다란 차이점, 한 가지가 존재한다. 바로 흑인의 유무이다.
 
지난 남아공 월드컵을 상기해 보면, 우루과이 대표팀의 대다수는 백인 선수들이었지만 왼쪽 측면에서 유난히 검은 얼굴로 눈길을 사로잡은 선수가 있었다. 바로 FC 포루투에서 활약하는 알바로 페레이라였다. 그 밖에 레알 마드리드의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했던 카를로스 디오고(현 사라고사), 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어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다리오 실바, 유벤투스의 실망스런 기대주 마르셀로 살라예타 등 우루과이 축구에서 흑인 선수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르헨티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아르헨티나에서 흑인 선수를 찾아볼 수 없다. 간혹, 눈에 띈다 해도 콜롬비아나 우루과이에서 건너온 용병으로 뛰는 선수들이다.
 
그렇다면 아르헨티나에는 애초부터 흑인이 없었던 것일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루과이 인구의 약 10%를 흑인이 차지하는 것처럼 아르헨티나 역시, 독립 당시 인구의 10%가 흑인이었다. 아르헨티나가 온대 기후이기 때문에, 이들은 열대 지방의 농업 노예와 달리 상류층의 가사일을 돕는 데 주로 종사했다. 또한, 운 좋게 자유를 얻었거나 주인집에서 도망쳐 나온 흑인들은 지금의 보카 지구에 모여 흑인 밀집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노예들에 비해 아르헨티나 노예들이 더욱 나은 처사를 받았지만, 아르헨티나에 독립 열풍이 불어 닥친 19세기에 이르러 이들의 운명은 역전을 맞게 된다.
 
아르헨티나의 19세기 역시,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처럼 ‘전쟁의 시대’였다. 1810년에 벌어진 독립전쟁을 필두로 1826년에는 브라질과의 전쟁, 1852년의 내전, 1865년에는 파라과이와 전쟁을 벌였으며 독립 이후 지속한 남진정책으로 남쪽의 인디오와 끊임없는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모든 전쟁에 아르헨티나의 흑인들이 대대적으로 동원됐다. 일부는 자유를 준다는 조건으로 주인집 아들을 대신해 참전했고, 일부는 더 나은 대우를 위해 아르헨티나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에서 ‘흑인 부대’가 맡은 역할은 바로 ‘총알받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들은 언제나 최전선의 가장 위험한 전장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고 참전한 병사 대다수가 시신이 되어 자유를 획득했다.
 
그 결과, 흑인들의 밀집지역이던 보카 지구는 남녀의 성 비율에 커다란 불균형이 초래됐고 남은 흑인 여성들은 유럽에서 막 이민 온 백인 남성을 배우자로 맞이해야 했다. 이렇게 혼혈에 혼혈을 거듭한 결과, 그나마 남아있던 흑인 유전자는 세대별로 갈수록 감소를 더해갔고, 아르헨티나 독립 100년도 안 되어 인구의 10%를 차지했던 흑인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흔적은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일원으로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한 클레멘테 로드리게스이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자신의 친정팀 보카 후니오르스로 복귀한 클레멘테는 아르헨티나의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이다. 다양한 혼혈관계로 어느 대에서 흑인 조상을 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얼굴의 윤곽에서 사라진 아르헨티나 흑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세네갈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의 이민자와 도미니카, 콜롬비아 등 다른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이민자들을 포함해 약 50,000여 명(아르헨티나 인구의 0.1%)의 흑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밖에, 아르헨티나 인구의 약 5%가량이 흑인 혼혈의 후예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카미니토 거리, 봄보네라 경기장, 보카의 유럽원정 선수단, 탕고 공연, 클레멘테 로드리게스(C)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정부 홈페이지, 보카 후니오르스 공식 홈페이지, 보카 팬클럽 세네이세 공식 홈페이지, 바르 수수 홈페이지, FIFA 홈페이지]
 
   

윤인섭 기자 press@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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