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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바토크 ⑩]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왼발의 달인 히바우두

기사입력 2010.01.14 00:26 / 기사수정 2010.01.14 00:26

박문수 기자



"축구는 영국이 만들었지만, 브라질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브라질이 세계 최고의 축구팀이란 사실을 쉽게 인정하며 무의식적으로 인식된 브라질 축구의 강력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오래된 관습으로 자리매김했지요. '엑스포츠뉴스'는 매주 목요일 본지 박문수 기자를 통해 브라질 축구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연재물 '삼바 토크'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편집자 주]

-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왼발의 달인 히바우두

[엑스포츠뉴스=박문수 기자]얼마 전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 속에 종영한 KBS 드라마 아이리스는 김소연이란 스타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애초, 김태희와 이병헌에 밀려 주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그녀는 조연이라는 역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매력을 대중에게 호소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또한, 지난 5월 종영한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은 주연 배우였던 김남주와 오지호보다 태봉이로 나온 조연 윤상현이 주연보다 값진 연기력으로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처럼 우리 일상에서는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미우라 켄타로우의 만화 베르세르크는 외팔의 주인공 가츠만큼 악역의 조연 그리피스도 빛나는 역할을 수행하며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도 스캇 피펜과 데니스 로드먼이라는 조력자의 힘을 빌려 당대 최고의 농구 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는 축구계에도 해당된다. 지난 시즌 6관왕이라는 대업을 달성한 FC 바르셀로나는 2009년 최고의 스타로 한 해를 보낸 리오넬 메시라는 스타 플레이어의 활약 속에 차비 에르난데스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라는 수준급 미드필더의 빛나는 조연의 역할로 찬란한 영광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히바우두는 어떨까? 세계 최고의 선수라는 타이틀이 아쉽지 않은 그는 호나우두라는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의 후광에 밀려 조연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현재는 우즈베키스탄 리그인 FC 분요드크르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가 몇 년간 보여준 브라질에서의 임팩트는 아직도 뇌리 속에 남는다. 아쉬운 점은 그를 바라보는 축구팬의 시선은 호나우두의 동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호비뉴도 마찬가지이다. 펠레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어린 나이에 現 유벤투스 소속의 미드필더 디에고 히바스와 브라질을 제패했던 그는 카카라는 선수에 밀려 주연보다는 조연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대표팀에서의 호비뉴는 카를로스 둥가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며 공격의 에이스로 군림했지만, 카카에 비해 주목을 덜 받고 있다.]

이번 삼바토크 10편과 11편에서는 각각 히바우두와 호비뉴를 통해 브라질 출신 조연급 선수들에 대해 알아볼 예정이다. 두 선수 모두 호나우두와 카카라는 더 나은 슈퍼스타의 후광에 밀렸으며 브라질을 대표하는 쉐도우 포워드라는 공통점이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2회 연속 결승에 진출에 성공했던 브라질은 호나우두라는 당대 최고의 포워드가 있었다.

당시 호나우두는 모든 수비수로 하여금 공포감을 낳으며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득점을 만드는 기계 같았다. 심지어 98 프랑스 월드컵 직전, 맞수인 프랑스의 수비수 릴리안 튀랑과 마르셀 데사이는 "호나우두를 막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헛다리 기술이 오른쪽으로 빠지는 걸 알면서도 당해야 된다. 호나우두를 막기 위해 집중적으로 밀착마크를 하는 순간 공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도 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호나우두는 결승 직전 일어난 발작 때문에 부상이란 최대의 악재를 극복하지 못하며 결승에서 주저앉았지만, 그의 퍼포먼스는 대단했다.]

그러나 과연 호나우두만이 공포의 대상이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축구에서 가정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히바우두를 위해 한 번 해볼 만하다고 본다.) 만일 히바우두가 없었다면 브라질은 브라이언 라우드럽의 골 세레모니에 넋이 나간 채 98 프랑스 월드컵 8강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비보를 가슴 속에 안은 채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2002 한일 월드컵도 마찬가지이다. 호나우두가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보여준 2골과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호나우지뉴의 패스를 환상적으로 마무리 지은 히바우두가 없었다면 브라질의 5번째 월드컵 우승은 없었을 것이다.

히바우두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왼발을 적절히 활용하며 상대 선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는 말 그대로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마저 자신은 히바우두 팬이라고 밝혔으니, 그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왼발의 달인' 히바우두는 어떠한 선수였을까? 더욱 자세히 알아보자.

히바우두는 다른 브라질 출신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가난이라는 짐을 안은 아픔이 많은 선수이다. 어린 시절 지독했던 가난은 그를 괴롭혔으며 부친상이라는 악재까지 겹치자 그는 생계를 위해 자기 자신을 축구 선수로 이끌었다.

1993년 히바우두는 상 파울루의 코린치안스에 입단하면서 브라질 전국리그 세리에 A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코린치안스를 거쳐 팔메이라스에 입단한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브라질 대표팀에 합류하며 자신의 주가를 한 단계 더 올린다.

올림픽이 끝난 후, 스페인의 데포르티보로 둥지를 옮긴 히바우두는 자신의 축구 인생의 반환점을 맞이한다. 이적 첫 시즌 만에 41경기에서 21득점을 올린 그는 전 시즌 리그 9위에 머무른 데포르티보의 96-97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3위라는 호성적을 이끌며 브라질을 이끌 재목으로 주목받는다. 이러한 그의 활약은 1997년 여름, 호나우두를 인테르 밀란으로 보내면서 절망에 빠진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의 러브콜을 받게 되었으며 11번이라는 등 번호와 함께 바르사의 홈 구장 캄 노우에 입성. 세계 최고의 스타로 명성을 드높인다.

바르사의 히바우두 영입은 성공적이었다. 난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 밀려 아쉽게 리그 2위를 차지한 점과 보드 진의 실수 때문에 호나우두를 잃은 절망은 히바우두와 함께 97-98시즌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게 되면서 잊게 되었다. 히바우두가 바르사에서의 첫 시즌을 34경기에서 19득점이란 준수한 기록으로 마감한 것은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팀에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이러한 기세는 1998 프랑스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애초, 브라질은 미들스보로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준 주니뉴 파울리스타를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중용했었다. 그러나 주니뉴의 부상 때문에 당시 브라질 감독 마리오 자갈로의 신임을 얻지 못했던 히바우두는 대표팀 10번이라는 중책을 맡으며 프랑스에 입성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대회에서 히바우두는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으로 대표팀의 준우승에 이바지한다. 특히 덴마크와의 8강전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의 이름을 전 세계 축구팬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질은 준우승을 기록했지만, 히바우두라는 스타를 재발견한 점은 고무적이었다.

월드컵 이후 캄노 우로 돌아온 그는 더욱 성숙해진 플레이로 바르사의 에이스로 거듭나며 팀의 리그 2연패에 크게 기여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이고 간결한 그의 드리블과 투수의 구속만큼 빠르고 정확한 그의 왼발 슛은 유럽을 강타했었다. 같은 해 파라과이에서 열린 1999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 대표팀의 2연패를 이끌었다. (당시 히바우두는 호나우지뉴, 호나우두와 함께 대회 내내 최고의 컨디션을 과시했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대표팀 명단에도 들지 못했던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일취월장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활약은 1999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드흐 수상이라는 성과를 낳았으며 호나우두가 부상으로 떠난 브라질 내 에이스 자리는 자연스럽게 히바우두로 메워졌다. 그러나 축구의 신은 세계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선 히바우두를 질투했던 것일까? 히바우두가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사이, 브라질과 바르사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우선, 브라질은 2002 한일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과유불급의 상태로 고전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선수는 선수 구성에 문제점을 낳았으며 잦은 감독 교체는 팀의 분위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94 월드컵 mvp 호마리우, 떠오르는 신성 호나우지뉴, 분데스리가의 간판 골잡이 에우베르, 슈페르리가의 괴물 포워드 자르데우, 세리에 A에서 위협적인 골잡이로 성장하는 아모로소 등은 존재만으로는 위협적이었지만, 대표팀에서는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부상으로 물러난 호나우두의 공백은 히바우두의 성장 때문에 메워졌지만 그를 보좌할 수 있는 선수의 부재는 아쉬움을 더했다. 힘든 여정과 우여곡절 끝에 히바우두의 브라질은 2002 한일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예선에서 막강한 모습을 보여준 라이벌 아르헨티나와 최고의 멤버를 지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기세에 눌리며 우승 후보에서 멀어졌다. 게다가 오랜 기간 1위를 지켰던 FIFA 랭킹도 3위까지 떨어지게 된다.

브라질이 팀의 위기라면 바르사는 히바우두 개인의 위기였다. 당시, 바르사의 루이스 반할 감독은 히바우두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러한 갈등은 쉐도우 포워드의 역할을 수행했던 히바우두에게 좌측 측면 미드필더라는 한정적인 임무를 떠맡겼다. (본래의 포지션에서 벗어난 히바우두는 대표팀과 바르사에서 보여줬던 자신의 장기를 잃으며 부진의 늪에 빠졌다.)

이러한 시련 속에 히바우두는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했으며 전 시즌 부상으로 인한 잦은 결장과 이로 인해 나타난 기량 저하는 그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낳았다.

(황제 호나우두가 오랜 부상을 이겨내며 대표팀에 돌아온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브라질이었다. 2001년 7월,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펠리페 스콜라리는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남미 지역 예선에서 벼랑 끝에 떨어진 조국을 구한 호마리우를 외면했으며, 신구조화와 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선발했다. 현재까지 브라질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수비형 미드필더 지우베르토 시우바와 이번 시즌 플라멩고의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에 이바지한 클레베르손 등이 이에 해당된다.)

- 선수로서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2002 한일 월드컵

2002 월드컵은 이변과 반전이 연속된 한 편의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호나우두가 재기에 성공하며 우승을 차지했던 브라질도 이변의 일부였지만, 개최국 대한민국은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전력 약화가 두드러진 독일도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유럽의 신흥 강호 터키는 3위를 차지했었다.

우승을 차지했던 브라질의 주연은 호나우두였다. 게다가 호나우두의 복귀는 히바우두가 차지했었던 주연 자리를 빼앗음을 의미했다. 3년간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서 위기 상황에서 팀을 구했던 구세주 히바우두는 8골이나 득점한 호나우두의 괴력에 밀리며 또 다시 조연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특히 히바우두는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2번의 득점 기회를 호나우두에게 양보하는 배려까지 보여주며 조연으로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회 직후, 호나우두는 2002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드흐를 차지하며 펠레에 이은 또 하나의 브라질 출신 슈퍼스타가 존재함을 다시금 전 세계에 알렸지만, 히바우두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앞서 언급한 ‘히바우두의 원수’ 반할이 바르사로 돌아왔으며 그의 복귀는 히바우두의 AC 밀란 이적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히바우두를 밀란으로 보낸 반할의 바르사는 2002-2003시즌에서 6위라는 최악의 결과로 시즌을 마쳤다. 반할의 이해할 수 없는 전술과 선수기용은 현재까지 미스터리며 필자는 아직까지 최고의 선수층을 보유했지만, 2002 한일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네덜란드를 말아먹은 반할의 미소를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의 구성원은 독보적이었다. 야프 스탐, 에드윈 반 데사르, 에드하 다비즈, 클라렌세 셰도르프, 루드 반 니스텔루이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선수들이 즐비했지만, 반할의 무리한 전술은 유럽 예선 탈락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바르사를 떠난 히바우두는 그는 마치 슈퍼맨이 힘의 근원인 태양을 잃은 채 크립토나이트에의해 기를 뺏긴 나약한 모습과 일치했었다. 밀란에서의 히바우두는 불행했으며 애초에 기대를 모았던 안드레이 셰브첸코와 최고의 투 톱을 이룰 것이라는 예상은 카를로 안첼로티가 히바우두를 좌측 측면 미드필더로 기용하는 오류를 낳으면서 제대로 발을 맞출 기회마저 잃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벤치 멤버였지만 밀란이 02-03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며 자신의 커리어에 챔스 우승이란 타이틀을 넣게 된 것뿐일 것이다.

1년간의 밀라노 생활을 청산한 그는 크루제이루, 올림피아코스, AEK 아테네를 거친 뒤 2002년 자신을 지도했던 스콜라리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났다. 72년생이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히바우두는 우즈베키스탄의 축구 전도사로서 분요드크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호나우두에 밀려 만년 2인자란 타이틀로 축구 인생을 보내고 있는 히바우두가 은퇴 직전까지 열정적으로 그라운드에 나설 수 있길 바란다.

[예고] ▶ 삼바토크 11회는 주연보다 아름다운 조연 下 호비뉴 편이 이어집니다.

[관련기사] ▶ [삼바토크 ⑨] 브라질 최고의 보석, 축구 황제 호나우두

[사진=AEK 아테네에서의 히바우두 ⓒ 히바우두 공식 홈페이지 캡쳐]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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