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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뷰] 영원한 '축구 황제' 호나우두

기사입력 2009.08.20 02:20 / 기사수정 2009.08.20 02:20

박문수 기자



▲ [사진 = 2006 FIFA 독일 월드컵 16강전에서의 호나우두 ⓒ 글로보 에스포르테 캡쳐]

[엑스포츠뉴스=박문수 기자] 2009년 3월 8일, 팔메이라스와 코린치안스의 캄페오나토 파울리스타 더비에서 놀라운 광경이 연출됐다.

바로, 축구 황제 호나우두의 복귀 골이 터진 것이다. 후반 62분경 출전한 호나우두는 인저리 타임이 다가오자 결정적인 동점골에 성공하며, 팀의 극적인 동점을 이끌었다.

이후 그는 코린치안스 소속으로 29경기에 출장해서 17골을 기록. 소속팀의 캄페오나토 파울리스타 우승과 코파 두 브라질 우승에 공헌하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것을 입증했다.

하지만, 현재 그는 손목 부상 때문에 지난 7월 말 팔메이라스전을 끝으로 그라운드와 잠시 결별한 상태이다. 그의 복귀는 9월 초에 있을 브라질 1부리그 산토스 전이 유력했지만, 브라질 언론인 글로보에 의하면, 손목 부상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9월 말이 되어야 그라운드에 복귀할 전망이다.

현재, 코린치안스는 1부리그 8위로 떨어진 상황이며, 모든 축구 팬은 그의 복귀가 이른 시일 내로 이루어지길 갈망할 것이다.

호나우두의 축구사

1976년 9월22일은 브라질 축구사에 있어서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날이다. 뉴욕 코스모스 소속의 축구황제였던 펠레가 은퇴한 날이자,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가에서 축구황제로 등극할 ‘호나우두’가 태어난 날이다.

즉, 브라질을 지배한 펠레의 은퇴식이 새로운 황제 호나우두의 탄생과 일치한 것이다.

그는 펠레의 전철을 따라, 크루제이루, PSV 아인트호벤, FC 바르셀로나, 인테르 밀란, 레알 마드리드, AC밀란을 거쳐 최근의 코린치안스까지 단단한 클럽에서의 경력을 쌓으며 순항한다. 게다가, 역대 월드컵 최다 득점인 15골 기록.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골잡이'로 주목받았다.

또한, 벤치에서 보낸 94년과 8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한 2002년에는 조국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맛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의 화려한 경력은 호나우두를 축구로 표현되는 대표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그를 처음 보게 된 것은 97년 한국 대 브라질전이 열린 잠실 메인 스타디움이다. 나이키는 그들과 후원을 체결한 한국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 차원에서 호나우두를 비롯한 당시 세계최강 브라질 국가대표를 초청해주었다. 한국팬 앞에서 묘기를 보여준 그는 ‘축구 = 호나우두’란 단어를 몸소 깨닫게 해줬다.

당시, 호나우두는 어딘가 어색한 외모와 대머리를 소유했지만,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축구를 즐기는 동네 아이들은 '내가 호나우두야'란 말을 했으며,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 이후 호나우두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했다.

하지만, 황제라는 칭호가 너무 부담되었을까? 그는 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을 기점으로 나락의 길에 빠지게 된다. 대회 출전 당시 그는 경미한 부상을 숨긴 채 출장해야 했다. 설상가상, 팀 동료인 호마리우와 주닝요는 월드컵 무대를 밟지도 못하게 되었다.

결국, 온 힘을 다해 브라질을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결승 직전 일어난 발작 덕분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급한 대로 약물을 강제 투여한 상태로 프랑스와의 경기에 나서지만,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그는 쓸쓸히 조국의 3:0 대패라는 수모를 눈앞에서 겪게 된다.

이후,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99 코파 아메리카에 출장.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며, '황제의 부활'을 알렸지만, 무릎 부상 재발로 그라운드와 결별하게 된다.

그리고 2001년 12월. 그는 인테르 밀란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소속팀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리그 후반기에는 풀타임을 소화하는 체력을 끌어올렸고, 인테르의 리그 우승이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라운드인 라치오와 인테르의 경기에서 일어난 ‘그레스코의 난’ 때문에, 유벤투스에게 챔피언을 내주게 된다.

교체된 호나우두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는 유럽의 빅 리그로 온 이후, 단 한 번의 리그 타이틀을 얻지 못한 비운의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은 달랐다. 그는 '매 경기 골을 넣겠다.'라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그라운드를 지배했다. 그 결과, 결승전 2골을 포함, 모두 8골을 기록. 완벽한 재기에 성공했다.

갈락티코 1기 정책으로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한 그는 이적 첫 시즌 라 리가를 우승하게 되면서 리그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 1기는 '무늬만 화려하다'는 비평 속에 막을 내린다.
 
또한, 06/07시즌 후반기 밀란 입성 후 리그에서 팀을 위해 좋은 활약을 펼치며, AC 밀란의 통산 7번째 UEFA 챔피언스리그 타이틀 획득에 숨은 공헌자가 되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뛴 경기 때문에 유럽 대항컵 출전 자격을 상실하였기에, 소속팀 우승을 멀리서 바라보아야 했던 불운의 스타였다.

가난으로 얼룩진 호나우두의 어두운 삶

유년 시절, 호나우두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모든 브라질 출신 선수가 그렇듯이 그에게 있어 축구는 인생인 동시에 삶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플라멩고의 서포터였던 그는 '플라멩고 유소년 입단 테스트'의 기회를 차비가 없어서, 포기한 전례가 있다. 결과적으로, 자일지뉴에 의해 스카우트된 직후 슈퍼스타가 되었지만, 너무나도 가난했던 시절은 한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난이 원인이었을까? 많은 수입을 얻은 호나우두는 다소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여자 다수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갑상선 비대증 때문에, 운동선수라 할 수 없을 만큼의 뚱뚱한 모습으로 등장하곤 했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재기의 의지를 보여준 호나우두

 



▲ [사진 = 코린치안스에서의 호나우두 ⓒ 글로보 에스포르테 캡쳐]

많은 축구 팬은 호나우두를 일컬어 '신의 능력을 소화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부상과 상대 수비수의 집착으로 인해 맘껏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호나우두는 '재기와 끈기'의 상징이다.

은퇴가 유력한 상황에서도,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근성을 보여줬다. 양쪽 무릎의 슬개건이 나가고, 오랜 기간의 부상 때문에 그라운드에서 벗어났어도, 이겨냈다. 현역으로 복귀한 그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자신의 팬들에게 보답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전성기 시절 보여준 날렵함과 상대를 쉽게 속이는 드리블 능력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모든 축구 팬들은 호나우두에게 설렌다. 그에게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브라질과 소속 클럽에서의 9번이라는 것과 더불어, '축구 황제 호나우두'이기 때문이다.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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