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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e스토리] 9년간의 판타지에 마침표를 찍은 '테러리스트' 정명훈

기사입력 2015.12.31 00:05 / 기사수정 2015.12.31 08:27

박상진 기자


[엑스포츠뉴스=박상진 기자] 추운 겨울날이었다. 인터뷰를 하기로 한 그는 극구 자신이 강남으로 온다고 했다. 인터뷰하기 전 들어간 음식점은 하필 올해 말까지 영업을 하고 문을 닫는 곳이었다. 입안이 씁쓸했다. 근방에서는 맛있는 집이라 자주 가곤 했는데, 문을 닫는다니 정말 아쉬웠다. 그러며 이날 인터뷰를 위한 만난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정명훈. 임요환과 최연성을 잇는 티원 테란의 후계자. 2010년 우승을 차지하고 2011년과 2012년에는 프로토스 허영무를 가장 마지막 무대에서 막아낸 브루드 워 ‘최후의 테란’이다. 2007년 SK텔레콤 T1 숙소에 처음 들어온 이후 2014년까지 한 팀에서 꾸준히 활동했고, 올해 데드 픽셀즈로 이적해 자신의 기량이 여전하다는 걸 알렸다. 하지만 그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예전부터 고민하던 일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제 제가 원하는 ‘최고’가 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게임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었어요. 그래도 해외 팀에서 좋은 경험도 해봤고, 나름 은퇴하기 좋은 시기라 생각해서 결국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데드 픽셀즈에서도 저를 잡지 않았어요. 내년에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자주 이야기를 했고, 게다가 WCS 룰이 바뀌면서 해외 팀 소속 한국 선수들의 거취가 불분명해졌거든요. 게다가 리그에서 한 번 탈락하면 계속 경기 없이 지내야 합니다. 물론, 크로스 파이널 같은 대회가 추가로 생겼지만 저는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을 자신이 없었어요.

꼭 WCS 시스템이 바뀐 게 제 은퇴 이유는 아닙니다. 대회 시스템이 그대로라도 계속 고민했을 테니까요. 잘해도 16강 정도 성적만 내서 수입도 많은 편이 아니었고, 처음 데드 픽셀즈에 입단했을 때 돈보다는 해외 대회에 많이 출전할 수 있도록 계약을 했죠.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국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정명훈은 원래 작년 은퇴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2014년의 부진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하기에는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았다. 하지만 SK텔레콤 T1에서 데뷔해 다른 국내 팀에는 가지 않았다. 자신을 프로게이머로 뽑아주고, 프로게이머로서 최고의 커리어를 달렸던 팀이었기에 다른 국내 팀의 유니폼을 입을 수 없었다. 



“아직도 SK텔레콤 T1을 좋아합니다. 어릴 적 게임을 좋아했던 제가 프로게이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바로 SK텔레콤 T1 덕분이니까요. 팀에서 나온 후 자주 연락을 못 해서 죄송하기도 합니다. SK텔레콤 T1에 입단한 날이 생각나네요. 팀에서 처음으로 공식 선발전을 진행했는데, 원래 1,024강 규모로 진행하려던 대회가 신청자가 너무 몰리는 바람이 2,048강으로 늘어났어요. 운이 좋게도 선발전에서 4강까지 올라가고 결국 T1에 입단하게 됐죠. 2006년 초였는데, 당시 중학교 3학년이라 학교를 마친 다음 해에 숙소에 합류했죠.”

정명훈이 숙소에 합류한 시기에 SK텔레콤 T1 테란으로는 현 감독인 최연성과 스포티비 게임즈 해설인 고인규, 그리고 전상욱이 있었다. 정명훈은 이들의 등 뒤에서 플레이를 보며 실력을 늘려나갔다. 정명훈은 숙소 생활 초반에는 최연성에게 혼나기도 했고, 입단 6개월 후가 지날 때까지 고인규를 이겨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숙소 생활이라는 건 아무래도 단체 생활이다 보니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제가 그런 경험이 없다 보니 혼나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아침에 형들을 보면 인사해야 하는데, 그냥 눈만 마주치고 인사를 안 했죠. 그래서 혼났는데, 그런 후에는 또 잘 대해주셨어요.

게임 내적으로는 (고)인규 형이 정말 높은 벽처럼 느껴졌죠. 숙소 합류 후에 6개월이 지나도 단 한판도 못 이겼어요. 뒤에서 인규 형의 경기를 보니 정말 깔끔하더라고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야 연습 경기에서 처음으로 인규 형을 이겼는데 정말 그 짜릿함이 지금까지 기억납니다.”

내부 평가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프로리그 경기장에 가지 못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열심히 노력하고, 1년의 시간이 지나자 정명훈은 두각들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노력이 발판이 되어 정명훈은 준우승을 거두게 되고, 2008년 인크루트 스타리그 준우승에 이어 바투 스타리그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2011년 정명훈은 박카스 스타리그 우승까지 손에 넣었다. 이후 진에어 스타리그와 티빙 스타리그에서 허영무를 맞아 두 번 연속 다시 준우승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브루드 워 후반기 ‘최종병기’라고 불리던 이영호를 꺾고 최고의 테란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프로게이머 초창기 시절 인규 형과 경기를 하면 벽을 만난 느낌이었는데, 그 느낌을 (이)영호한테 받았어요. 아무리 찔러도 무너지지 않고, 빈틈을 찾아도 금방 복구했죠. 다른 프로게이머와 느낌이 완전히 달랐어요. 그야말로 단단한 벽이었죠. 영호와 만나면 다른 게이머들과 다른 경기 양상이 나왔어요. 정말 재미있었죠.

반면 허영무 선수는 제게 엄청난 좌절을 안겨줬죠. 같은 부산 출신이라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이상하게 허영무 선수를 상대하면 게임이 이상해지더라고요. 그리고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항상 프로토스가 제 발목을 잡았는데, 이게 결승전에서 두 번이나 겹치니까 정말 극복하기 힘들었죠.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악몽이었어요. 차라리 스타크래프트2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2013년 본격적으로 스타크래프트2를 시작한 정명훈은 프로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정형화된 스타크래프트2 방식이 아닌 브루드 워에서 하던 방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했고, 이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상대들에게 승리를 많이 거둔 것. 

“당시 (임)요환이 형이 감독이었는데, 출전 기회도 많이 줬었고 그만큼 승리도 많이 거뒀죠. 연패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한 해를 두고 보자면 만족스러운 성적을 냈습니다. 당시 테란이 저밖에 없어서 요환이 형이 24시간 붙어있으면서 관리하는 바람에 정말 피곤했어요(웃음). 하지만 뒤끝이 없고 불만을 이야기하면 잘 받아줬던, 좋은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경기에 출전한 정명훈은 피로를 느꼈고, 2014년에는 후배들에게 출전 기회를 양보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정명훈에게 독이 됐다. 방송 경기에 나가지 않으며 경기 감각을 조금씩 잃어버린 것. 게임 밸런스가 테란에게 좋지 않은 악재까지 겹치며 정명훈은 점점 머릿속에 ‘은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정명훈은 2014년 시즌이 끝나자 바로 팀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팀을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제 생각을 정리해서 이야기하니 팀에서도 알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말려봐야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아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왔죠. 그러고는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2014년 성적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요. 제 은퇴설을 듣고 눈물을 보이신 팬도 있었고요.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에 해외 팀을 찾았죠. 

사실 찾기도 전에 제가 SK텔레콤 T1을 나왔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데드 픽셀즈에서 연락이 왔어요. 신생팀이라 걱정되는 마음에 처음에는 거절했죠. 저보다 먼저 팀에 들어간 (방)태수가 좋은 팀이라고 이야기를 해 줬고, 데드 픽셀즈에서도 다시 한 번 연락을 주셔서 입단하게 됐습니다. 돈보다는 해외 대회에 많이 나가고 싶었고, 팀에서도 그런 제 의사를 받아들여서 올 한해는 정말 많은 해외대회에 나갔었죠.”

프로게이머가 된 지 8년만인 2015년, 정명훈은 자력으로 해외 대회를 나갔다. 정명훈은 이 시기를 “정말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시야도 넓어지고, 대회가 끝난 후 남는 시간에 관광을 즐길 수도 있었다는 정명훈의 이야기. 해외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도 정명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며 정명훈은 차츰 자신의 경기력을 회복했고, 10월에는 블리즈컨 현장에서 열리는 WCS 글로벌 파이널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포인트가 부족했던 정명훈은 안심할 수 없었고, 마지막에 열린 드림핵 결과를 봐야 했다.

“드림핵에서 16강만 가면 안정권인데, 마침 포인트 경쟁자였던 (고)석현이 형한테 일찌감치 패배해서 탈락했어요. ‘내 프로게이머 인생은 여기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박)령우가 탈락하면서 저한테 기회가 왔죠. 그런데 석현이 형이 또 결승까지 가버린 거에요. 다행히 (강)민수가 석현이 형을 꺾고 우승하는 바람에 마지막 기회를 잡았죠. 

이건 정말 하늘이 내게 기회를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열린 WCS 글로벌 파이널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석현이 형을 3대 2로 꺾었어요. 정말 마지막 큰 무대가 온 거죠. 나중에 따로 민수에게는 고맙다는 의미에서 소고기를 사기도 했죠.”



아쉽게도 정명훈은 WCS 글로벌 파이널 16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블리즈컨 현장 무대는 8강에 진출해야 밟을 수 있는 곳이었고, 정명훈은 이 순간만큼은 은퇴를 미루고 한 해 더 프로게이머를 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명훈은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소속팀에 이런 의사를 밝혔고, 12월 말 정명훈의 은퇴가 발표됐다. 정명훈은 은퇴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무덤덤했는데, 정작 기사를 보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아쉬워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정명훈도 어느 정도 아쉬운 마음을 정리했다.

임요환과 최연성, 그리고 고인규와 전상욱을 이은 SK텔레콤 T1 테란 에이스였던 정명훈은 자신의 뒤를 이어 ‘국본’이 될 게이머가 누군지 물어보았다.

“국본이요? 그거 굉장히 오글거리는 별명인데(웃음). 그래도 첫 스타리그 때 색이 없던 기간 저를 잘 채워준 별명이죠. 오글거리지만, 한편으로는 멋있는 별명이에요. 최고의 팀의 에이스를 계보를 잇는다는 의미니까요.

요환이 형이 스타크래프트2를 하면서 같은 팀에 있던 (문)성원이 형이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으며 저하고 겹치는 위치가 된 게 아니냐고 묻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성원이 형이 잘 되고 그런 별명을 얻는 게 좋았어요. 같은 팀에서 생활했고, 정말 성실한 형이었거든요. 제가 스타크래프트2를 잘 모르던 시절에도 성원이 형이 활약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뻤죠.

2015년 SK텔레콤 T1의 선수가 너무 바뀌어서 누가 그 칭호를 물려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제 생각에는 제가 마지막이 되든지, 아니면 팀에서 오래 있던 (김)지성이가 실력이 좋아져서 에이스의 계보를 이어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른 별명인 ‘테러리스트’는 처음에 정말 싫었어요. 리그를 망친다는 의미 때문에. 엄재경 해설이 바투 스타리그 결승에서 그 별명으로 밀어보는게 어떻겠느냐 물어봐 주셨는데 극구 반대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의미 있는 별명인 거 같아요. 강한 상대에게는 정말 강하고, 반대로 약한 상대에게는 약했지만(웃음), 테러리스트라는 의미가 강한 상대에게 도전하는 이미지니까요. '정의의 테러리스트'랄까.”



정명훈은 프로게이머 인생을 정리하며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2014년 초라고 말했다. 그때 더 열심히 하고 적극적으로 경기에 나갔으면 아직도 SK텔레콤 T1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팬분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올 한해 행복한 일이 많아서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글로벌 파이널에서 마지막 경기가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 무대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게 행복했다고 말했다.

“해외 팀으로 가면서 팬들을 만날 기회가 줄어 다들 아쉬워하시더라고요. 그래서 1년에 한 번은 자리를 만들어 팬들을 보려 했고, 얼마 전에 따로 팬미팅을 진행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은퇴하게 되어 죄송했습니다. 그래도 1월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마지막으로 뵈려고 하고요. 그 전까지는 영어 공부도 하고 프로게이머가 되기 전 꿈을 이뤄보고도 싶어요.

어릴적 꿈이 게임 개발자였거든요. 프로게이머를 하면서 그 꿈을 접었지만, 이제는 그 경험을 살려서 게임 개발자가 되어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다양한 게임을 해볼 계획입니다. 방송 이야기나 리그 오브 레전드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방송은 아직 계획에 없고 리그 오브 레전드도 지금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죠. 주로 정글을 갔는데, 할 때는 나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정리하려는 순간, 여태까지 물어보지 않은 질문이 떠올랐다. 왜 정명훈은 자신의 아이디를 ‘판타지’라고 지었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게임을 정말 환상적으로 재미있게 했으면 좋겠다. 그런 이유였다. 정명훈 스스로도 자신의 프로게이머 인생을 돌아봤을 때 자신의 아이디에 부끄럽지 않은 커리어를 보냈다고 말했다. 아쉽지만 성적에는 만족스럽다는, 프로게이머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누려봤다는 정명훈은 특히 끝까지 자신이 최선을 다해 결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보였다.

“최근 스타크래프트 쪽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저까지 은퇴 소식을 들려드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신년에 좋지 않은 소식으로 시작하느니 좋지 않은 소식은 2015년으로 끝냈으면 하는 바람에 은퇴를 결심했고요. 이제 프로게이머는 아니지만, 꼭 스타크래프트2가 좋은 결과를 내고 부흥했으면 좋겠습니다. 은퇴 소식을 듣고 연락해오는 동료들에게도 스타크래프트2를 잘 부탁하는 이야기를 했고요. 저도 프로게이머를 했던 한 사람으로 남은 동료들, 관계자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9년간 사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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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기자 vallen@xport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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